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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4.09.01 10:06
78
7
https://itssa.co.kr/16245018

내 인생에서 진이란 술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수학여행이던가 아니면 수련회던가 그랬는데, 꽤 친했던, 평소엔 너무나 얌전했던 친구가 가방 안에 '해태 런던 드라이진'을 담아 왔더군요. 아무것도 모르고 술이라면 그저 좋다고 마셨던 때였고, 알던 술이란 게 친구들과 방구석에 몰래 숨어 쳐마시던 소주나 아니면 부모님께서 장식장에 선물받아 넣어 두셨던 위스키나 코냑 같은 거여서, 진이란 술에 대해선 몰랐지요.

처음 진을 마셨을 때 그 화끈함에 놀랐고, 짙은 소나무 향에 다시 놀랐습니다. 이게 뭐지? 싶기도 했고. 고 2 겨울방학때 동네 카페에서 아는 형이 하시는 카페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그 형은 제게 가끔 진토닉을 만들어 주셨고 진에 대해서 그때쯤 거부감이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티니를 마시다가 이건 뭐지 하기도 하고.

뭐, 건들건들하며 젠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삐리' 시절에 마실 술은 아니었을겁니다. 게다가 술맛을 제대로 알고 마신 것도 아니었고. 미국에 와서도 가끔 진을 사 마시곤 했는데, 저렴한 시그램 진 같은 걸 마셔서 그런지 별로 진 마시고 뒤끝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그걸 그렇게 스트레이트로 마셔댔냐고. 보드카는 마시고 취해도 뒤끝이 좋은데, 진은 잘못 마시면 정말 극악한 숙취를 겪어야 했지요. 애초에 그걸 숙취를 느낄 만큼 마시는 게 바보짓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이 먹고 나니 술맛도 좀 알게 되고, 무엇보다 술을 절제하는 법을 - 반강제로-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마시는 술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와인도 가까워졌고(어쩌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에 술을 천천히 마시는 버릇을 들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이런 말 하면 저와 와인을 가장 많이 마셨던 벗님께선 아마 배꼽을 잡고 웃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그러다보니 진짜 천천히 마셔야 제 맛을 알게 되는 술들을 알게 됐습니다. 그중 하나가 봄베이 사파이어였습니다. 파란 병에 담긴, 이른바 '모던 진'의 대표주자죠.

진이란 술이 원래 네덜란드에서 '주네비에르' 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등등의 이야기는 어차피 인터넷으로 뒤져보면 그 역사가 빼곡하게 나옵니다. 진은 칵테일용으로 많이 쓰이는 술이고, 다른 양주에 비해 도수가 높은 놈들도 적지 않습니다. 위스키나 테킬라, 심지어는 보드카도 가장 많이 팔리는 건 40도에 맞춰져 있지요. 물론 럼이나 보드카 중엔 도수가 엄청나게 높은 것들도 존재하고, 중국술들이야 그 강한 도수 때문에 그걸 매일 엄청나게 마시는 어떤 멧돼지가 아직도 살아 있는게 용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팔리는 진들을 보면 대략 47% 정도에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진의 맛을 알게 되면 적어도 주酒님을 모시며 산 구력이 꽤 된다는 이야기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처음에야 거의 진토닉의 기주로서 진의 맛을 배우겠지만, 드라이 마티니를 내가 알아서 찾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술에 돈도 건강도 꽤 내어주고 난 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엔 진이 싸구려 술의 대명사였다고 하지만, 지금이야 원체 괜찮은 진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 그 솔잎 내음이 가끔씩 땡겨 일부러 찾아마시는 간헐적 송충이가 바로 접니다.

아무튼, 진토닉이 여름날 시원하게 한 잔 쉽게 만들어 마시는 비교적 가벼운 칵테일이라면, 마티니는 확실히 어른의 술이다 싶습니다. 이태리 마티니 사가 만든 버무스(베르무트)라는 강화 와인이 있습니다. 와인인데 여기다가 쑥도 넣고, 키니네, 용담, 창포뿌리 등을 넣고 주정을 넣고 강화한 와인이죠. 보통 이걸 그냥 마시는 경우는 제가 알기론 별로 없지만, 그냥 마셔보면 확실히 약초 향이 좀 나면서 약간은 달달한 느낌도 납니다. 근데 진과 버무스를 3:1 비율로 섞은 게 클래식한 마티니지요. 요즘은 진 6에 버무스 1을 표준으로 잡는다고 합니다만.

이걸 이렇게 섞어 놓으면 묘한 느낌이 납니다. 여기에 올리브를 넣고, 올리브 병조림 국물도 약간 넣어주기도 하는데, 아무튼 클래식한 마티니는 이런 모양인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마티니는 그 잔이 특이하지요. 보기만 해도 뭔가 라스베가스 같은 곳의 퇴폐스러움이 연상되는 역삼각형의 잔, 그리고 올리브 두 알이 딱... 사실 마티니는 처음 마시면 정말 '실망스러운' 칵테일입니다. 이게 칵테일이라고? 나름 하이볼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진토닉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함보다는 뭔가 무거운 느낌이 있는 칵테일이죠. 007 제임스 본드 덕에 보드카 마티니가 인기를 얻긴 했지만, 역시 마티니의 정수라면 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티니의 매력은 아주 천천히 마실 때 드러납니다. 입술을 적시기만 하듯 살짝살짝. 처음엔 향도 느끼지 못하지만 마셔볼수록 기주와 버무스의 조합이 천천히 드러나지요. 여기에 짭짤한 올리브를 조금씩 깨물어 먹고, 그 기운이 약간 남아 있는 입에 다시 술을 아주 조금 털어놓고. 그러다보면 천천히 취기도 올라옵니다. 화끈하게 마시려다가는 오히려 술을 쏟기 쉽죠. 그게 마티니 잔의 마술이랄까요. 제대로 마시려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시면서 즐겨야 하는 거지요.

아무튼, 며칠 전 샀던 시애틀의 마이크로 디스틸러리에서 나온 '빅 진'이 나름 괜찮은 술이네 생각하면서 이걸로 진토닉도 만들어 마시고, 마티니도 만들어 봤습니다. 저는 3:1 비율에다가 올리브 주스 넣은 더티 마티니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그냥 니트로 마셔도 괜찮을 퀄러티의 진입니다. 시애틀에선 요즘 이런 마이크로 디스틸러리가 계속 생기던데, 이것도 어쩌면 세상 돌아가는 꼴이 험하니 마시고 취하자는 그런 생각들이 작용해서일까요? 아무튼 그렇게 천천히 마티니 한 잔 만들어 마시니 취기가 돌고, 세상 돌아가는 거 잠깐 잊고 싶어지더이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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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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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건강 행복하세요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9.10 21:59
    베스트
    @너와집

    그래야지요. 좋은 세상 바라는 우리 모두...

  • 2024.09.01 10:41
    베스트

    명탐정코난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와서 반갑네요. 위스키 보드카 와인 마시는 어른들이 그렇게 멋져보이던데...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9.10 22:00
    베스트
    @F킬라칙칙

    명탐정코난이 익숙한 세대가 아니다보니 조금 갸우뚱 했어요. 술 마시는 장면들이 꽤 나오는 모양이군요. 

  • 2024.09.10 22:02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아! 거기 나오는 검은 조직이라는 조직원들 이름이 다 술이름이예요! 진 워커 버본 베르무트 등등 ㅎㅎㅎㅎ 

오버씨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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