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2024.01.08 06:28  (수정 01.08 16:45)
458
20
https://itssa.co.kr/9433008

잘 쓰던 큐리그 머신이 고장나 이걸 수리할까 했는데, 수리하는 비용과 새로 사는 비용이 같습니다. 이래서 미국이 문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스트코에서 세일할 때 $99.99 에 세금 주고 샀습니다. 이걸 고치는 비용이 백달러이니 그냥 새거 사는 게 나은 겁니다.

어쨌든 일요일 오전, 성당에 다녀오며 수퍼마켓에 들러 도넛 네 개에 5달러에 세일하길래 사 왔습니다. 시애틀에서 꽤 유명한 탑팟이라는 로컬 도넛 가게에서 대형 수퍼마켓 체인인 QFC에 납품하는 겁니다. 미국의 전통적인 쇼핑 방식은 이미 20세기 초, 정확히는 1920년대부터 30년대 사이에 정착됐지요. 기존의 전통 시장들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 규모는 당연히 축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초의 현대식 수퍼마켓은 뉴욕 지역에 생긴 킹 컬렌 King Kullen 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아이리시였고, 꽤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대공황의 파도에서 조금 비껴날 수 있었던 그는 이런 수퍼마켓 구상을 해서 받아줄 만한 곳들에 들고 다녔다고 하지요.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자 직접 마켓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신문광고를 통해 "귀찮게 장바구니를 들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카트에 상품을 직접 골라 담고, 심지어 포장까지 저희가 해 드립니다!" 라는 문구, 그리고 구호로는 "Pile it high, sell it low 높게 (상품을) 쌓고 싸게 팔자" 를 정했습니다. 지금은 매우 당연한 수퍼마켓이 이렇게 탄생합니다.

일단 그때까지 점원들이 일일이 고객 하나하나에 응대해 상품을 꺼내오던 방식이 파괴되자, 당장 고용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원래 직원들이 하던 일을 손님들이 직접 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카트라는 것이 그때 처음 등장합니다.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종이백도 그때 처음 만들어진 겁니다. 아무튼 이런 식의 쇼핑문화가 시작되면서 확산 일변도에 들어섭니다. 대도시 뿐 아니라 중소 도시, 중서부에도 이 문화가 확산됩니다. 어차피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일상인 사람들이니 굳이 이런 마켓은 사람들이 많은 대도시 옆을 고집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아서 차 몰고 찾아 오니까요. 미국의 유통망도 이때부터 제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시행 이후 만들어진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들은 이런 유통망을 더욱 공고하게 구축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런 마켓들은 미국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켓보다 더 놀라운 시스템이 생겼습니다. 1983년 시애틀에서 생긴 코스트코(당시 이름은 프라이스 클럽)는 회원제 수퍼마켓으로 운영됐고, 처음엔 소매자들을 위한 도매시장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해 회원을 늘려 나갔습니다. 여기서 파는 물건들이 질도 좋고 가격도 다른 곳보다 엄청나게 저렴하다는 입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죠.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이 '입소문'입니다. 기존의 수퍼마켓들은 신문, 라디오, 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 광고를 하며, 매주 세일 품목을 바꾸어 팔기 때문에 이것이 홍보돼야 합니다. 심지어 신문들도 이들 큰 광고주들을 위해 수요일판에 와인과 먹거리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냈는데, 이것도 알고보면 다 이들의 광고와 관련 있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코스트코는 이런 광고를 할 필요가 없었고, 이용자들이 스스로 아깝다고 생각 하지 않으며 연회비를 냈습니다.

저도 코스트코가 없으면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막막해질겁니다. 수입의 1/4에서 많을 때는 거의 절반을 코스트코에서 쓰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미국에서 저 정도의 수입이 있는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음을 실감합니다. 커피 머신을 고쳐쓰지 못하지만, 고치는 것과 같은 가격으로 새 커피머신을 살 수 있는 곳. 그리고 거기에 들어갈 커피도 당연히 코스트코에서 사고, 심지어 제가 지금 타고 다니는 폭스바겐 티구안도 코스트코의 오토 프로그램을 통해 구입했던 거고, 와인 구매량의 절반, 육류 구입량의 90%(가끔 중국마켓이나 한국마켓에서 사기도 해서), 아무튼 전반적 식료품 구입의 대부분이 여기서 이뤄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우리 애들 세대에서 코스트코의 역할을 하는 건 아마존입니다. 요즘은 이상한 다른 인터넷 쇼핑몰들에서도 물건들이 집으로 배송되기에 보면 알리 익스프레스 같은 건데, 저는 안 쓰는 거라 전혀 모르겠어요.

 

아무튼 조금 춥고, 커피와 도넛이 당기던 일요일, 저는 아직도 완전히 죽지는 않은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보스턴 크림 두 개, 올드 패션 한, 애플 프리터 한 개를 샀고, 여기에 5달러를 지불했고, 나름 평화로운 1월의 첫 일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오후 한 시가 지났군요. 앞으로 한 시간 있으면 김어준의 뉴스공장 시작하겠네요.

미쳤나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안 마셔서 그런가, 벌써 세 잔째 커피가 들어가고 있네요. 큐리그 머신으로 뽑은 커피는 늘 신선하고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드립커피의 느낌을 내 주네요. 요즘은 커피를 만들기 위한 물통에 물을 여과할 수 있는 장치까지 들어가더군요. 어쨌든 유통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처럼 내 삶의 방식도 그렇게 달라지고 있고, '절대적인 편리함'은 늘어나고 있음에도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생각할 게 너무 많고, 의심도 너무 많이 생기는 세상입니다. 그나마 가장 솔직한 건 내 식욕일까요. 커피에 탐닉하고 싶은 그런 일요일 이른 오후입니다.

댓글 28

댓글쓰기
  • 2024.01.08 07:27
    베스트

    미국 생활의 단편에서 출발하여 미국 쇼핑 문화의 사적 변화까지...

     

    시사지 칼럼을 읽는 느낌입니다. 👍👍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13:33
    베스트
    @케르베로스 감사합니다 ^^
  • 2024.01.08 07:46
    베스트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한가한 일요일 일상이 눈에 선하네요

    제가 사는곳의 코스트코는 시간선택 잘해서 가야해요

    사람들이 느무느무 많아서 ㅠ 

    단촐한 식구라 코스트코 연회비가 아까울지경이지만

    없으면 또 아쉬워 매해 꾸벅꾸벅 연회비 갖다바치고 있죠 ㅎㅎ

    한가한 일요일오후 보내세요 🤗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13:34
    베스트
    @민주JK 요즘 코슷코에서 장보는 사람 정말 꽤 늘었다는 생각도 들고, 점심 저녁도 여기서 해결하는 이도 많이 늘어난 거 같아요.
  • 2024.01.08 08:01
    베스트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생생한 미국얘기를 접하면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잠시 미국에 다녀온 기분이 드네요.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13:34
    베스트
    @안씨 그렇게까지 몰입해 읽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 2024.01.08 14:15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아닙니다~ 정말 글을 너무 잘써주셨어요. 제가 감사드립니다.
    글이 술술 잘 읽히면서 머리속으로 그 장면들이 저절로 떠오르더라구요. 비록 애플 프리터랑 보스턴 크림은 뭔지 잘 몰라서 던킨 도넛이 떠오르긴 했지만요. ㅋㅋㅋ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22:28
    베스트
    @안씨 아, 보스턴 크림 도넛은 한쪽 면엔 초컬릿이 입혀져 있고 속엔 커스터드 크림이 채워져 있는 거구요, 애플 프리터는 설명하긴 좀 복잡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집에서 만들어 드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https://blog.naver.com/topms93/220152154260
  • 2024.01.09 07:30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우와~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애플 프리터는 정말 처음 접하는건데, 덕분에 새로운걸 알게 되었네요!
  • 2024.01.08 08:06
    베스트

    좋은 글입니다 

    이런 글 자주

    올려주세요 👍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13:35
    베스트
    @석양 정치가 나아지면... 그리고 윤가가 탄핵되거나 쫓겨나면 이런 글 쓸 일도 더 많아지겠죠?
  • 2024.01.08 08:10
    베스트

    코스트코 주식 사야곘군요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13:35
    베스트
    @잇싸웰 아, 그건 장담 못해요 ^^
  • 2024.01.08 15:29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배당 많이 주던데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08 22:32
    베스트
    @잇싸웰 나름 건실하긴 하네요

    https://www.google.com/search?q=costco+stock&newwindow=1&sca_esv=596546401&rlz=1C1CHZN_enUS990US990&sxsrf=ACQVn09-g3-LExYyQtwUJwEKIkwW8gfvDw%3A1704720615947&ei=5_ibZczAOceb0PEPy4OiwAE&ved=0ahUKEwiM0ISW882DAxXHDTQIHcuBCBgQ4dUDCBA&uact=5&oq=costco+stock&gs_lp=Egxnd3Mtd2l6LXNlcnAiDGNvc3RjbyBzdG9jazIQEAAYgAQYsQMYgwEYRhj6ATILEAAYgAQYsQMYgwEyCxAAGIAEGLEDGIMBMgUQABiABDIFEAAYgAQyBRAAGIAEMgUQABiABDIFEAAYgAQyBRAAGIAEMgUQABiABDIcEAAYgAQYsQMYgwEYRhj6ARiXBRiMBRjdBNgBA0jxN1AAWK81cAJ4AZABAJgBrwGgAacNqgEEMy4xMbgBA8gBAPgBAagCFMICBBAjGCfCAgoQIxiABBiKBRgnwgIKEC4YgAQYigUYJ8ICDhAuGIAEGMcBGK8BGI4FwgIFEC4YgATCAgsQLhiABBjHARivAcICBxAjGOoCGCfCAhYQABgDGI8BGOUCGOoCGLQCGIwD2AEBwgIREC4YgAQYsQMYgwEYxwEY0QPCAgsQLhiABBixAxiDAcICCBAAGIAEGLEDwgIWEC4YgAQYigUYQxixAxiDARjHARjRA8ICChAAGIAEGIoFGEPCAg4QABiABBiKBRixAxiDAcICGRAuGIAEGIoFGEMYsQMYgwEYyQMYxwEY0QPCAhAQABiABBiKBRhDGLEDGIMBwgIQEC4YgAQYigUYQxjHARjRA8ICCxAAGIAEGIoFGJIDwgIUEC4YgAQYywEYkgMYxwEYrwEYjgXCAg4QABiABBixAxiDARjJA8ICFBAuGIAEGIoFGJECGMcBGK8BGI4FwgIjEC4YgAQYigUYkQIYxwEYrwEYjgUYlwUY3AQY3gQY4ATYAQLCAgoQABiABBgUGIcC4gMEGAAgQYgGAboGBggBEAEYC7oGBggCEAEYFLoGBggDEAEYEw&sclient=gws-wiz-serp
  • 2024.01.08 22:47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네. 5년 전에 알았으면 배당 먹으러 샀을 듯
  • 2024.01.10 06:11
    베스트

    저도 코스코 한번 가면 400~500 불씩 쓰고 오게 됩니다 ㅎㄷㄷ

    가기가 무섭네요 ㅜㅜ

    아 그리고 알리익스프레스 같은건 혹시 테무 아닌가요?

    저도 가끔 애용하고 있습니다 ㅋㅋ 

     

    덕분에 미국 수퍼마켓 체인의 역사 잘 배웠습니다.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10 23:01
    베스트
    @Prophet 테무랑 알리랑 같은 건가요? 중국계도 꽤 많이 있더라구요. 저는 아직 아마존도 잘 안 쓰는 편이죠. 아마 일종의 꼰대기질 아닐까 싶긴 한데요 ^^
    확실히 한번 가면 쓰는 양이 확 늘어서... 갈 때마다 체념하고 있습니다. 다른데서 사면 이게 얼마인데...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꾀하는 편이구요.
  • 2024.01.12 15:45
    베스트

    temu.com 이라고 요새 미국에서 참 핫한 사이트인데,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테무 앱이 1위를 할 정도 입니다.

    알리랑은 다른 업체이고, 취급 품목들도 약간은 다른듯 하네요,

    싼게 비지떡이라고, 퀄리티는 영 별로인 물건들이 많은데,

    가끔씩 가성비 좋은 물건들 득템하는 손맛?이 좋습니다;;

    10불 이상 주문시 무료배송이고, 아마존 보단 느리지만 알리보만 빨리 도착하네요.

     

    아마존에서 파는 비슷한 물품들 가격대비 50~70%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어짜피 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서, 저는 욕실 벽 거치대 등등 퀄리티 크게 상관 없는 물건들 위주로 가끔씩 주문합니다.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12 15:47
    베스트
    @Prophet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2024.01.16 15:32
    베스트
    @Prophet 오~ 감사해요.
    이런 싸이트 있는지도 몰랐네요. 👍👍
  • 2024.01.13 17:44  (수정 01.13 17:45)
    베스트

    Screenshot_20240113_094238_Chrome.jpg

    궁금해서 스페인에 있는 코스트코 찾아보니 저는 코스트코 가려면 가까이는 300km 멀리는 500km 이상 운전해서 가야하네요 ㅜㅜ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13 23:18
    베스트
    @콩나물국밥 바르셀로나 사시는 모양이군요? 요즘 그러잖아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와인들이 좋아져서 스페인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던 차였는데... 리오하는 원래 좋지만, 프리오라토나 리베로 델 두오로도 정말 좋고, 최근엔 라만차산도 많이 좋아졌더라구요. 코스트코를 통해서 구입해서 마시는 스페인 와인들이 많이 늘었어요.
  • 2024.01.15 04:27  (수정 01.15 04:37)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아뇨~~ 지중해 연안 도시지만 바셀은 아니예요 ~^^
    리오하랑 리베로 델 두오로 좋져~~~^^ 저는 개인적으로 화이트와인을 좋아해서 레스토랑 가면 알바리뇨 Albariño 를 주로 시키는데, 혹시 코스트코에 Rias Baixas 산 화이트와인 있으면 한번 드셔보세요~ ^^ 산도가 좀 있어서 식전주로 좋아요~~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15 09:54
    베스트
    @콩나물국밥 알바리뇨 아주 가끔 마셔요. 비슷한 와인으로 프랑스에서 나오는 뮈스까데 세브레 에 멩도 알바리뇨랑 느낌이 비슷하거든요. 여기가 딴 건 몰라도 굴이 괜찮은 게 가끔 나오기 때문에, 굴이랑 같이 하기에 딱 좋은 와인이죠. 아마 알바리뇨랑 뮈스까데 만드는 데 쓰이는 믈롱 드 부르고뉴라는 포도가 비슷한 거 같아요.
  • 2024.01.15 16:39  (수정 01.15 16:39)
    베스트
    @고양이네마리

    아~~~ 이미 아시는군요~~^^ 많은 분들이 스페인 와인하면 리오하는 알아도 알바리뇨는 모르시더라구요~^^ 고양이네마리 님 알고보니 와인 전문가?^^
    가끔 추천 와인 올려주세요~~~
     

  • 2024.01.16 15:36
    베스트

    오늘도 미국역사를 배우고 갑니다~~ㅎㅎ

    씨애틀 살아도 고양이네마리님처럼 미국에 대해 다방면으로모든 지식을 두루 알고 있는분을 못봤어요. 

    탑팟도넛 맛있죠~ 중성지방 높다고해서 조심하고 있지만 도넛과 커피는 포기할수 없지요~ 🍩☕️🥛

  • 고양이네마리 작성자
    2024.01.16 18:22
    베스트
    @눈바람사탕 저도 탑팟 애플 프리터랑 보스턴 크림 너무 좋아해요 ^^ 하긴 그 집은 올드패션도 맛있죠.
오버씨K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