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첫사랑] 선배에게. 20
2024.04.25 15:33  (수정 04.25 15:51)
480
42
https://itssa.co.kr/13483807

ㄱㅌ선배,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선배를 처음 만난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요.

아직도 선배 그 웃는 얼굴은 어제처럼 선명한데 말이에요.

 

96학번 새내기였던 저에게 92학번 3학년 복학생이었던 선배는 참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도 스물네살 애기인데,

선배라고 우리 동기들 우르르 데리고 학교 앞 아카데미식당에서 밥 사주고, 어른 노릇하느라 좀 힘드시기도 했을 거에요. 

 

여중-여고 테크트리라 남자 대할 줄도 모르는 선머슴같던 전데, 글쎄 모르겠어요.

동기들이나 95학번 선배들이랑 마주치고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도 유독 학교 가면 선배만 찾게 되던 이유를요.

3학년이라 1학년 우리 수업은 같이 듣지도 않았는데

과방문이 열려도 선배가 아닐까 두근거리고

강의실 돌아다닐 때도, 상경대 건물 앞 잔디에서 동기들이랑 수다떨 때도, 

선배가 어디 지나가나 두리번 거리다가

문득 발견하기라도 하면 또 철렁 내려앉던 그 심장의 느낌, 이 글을 쓰다 보니 떠오르네요.

 

연애는 커녕 빠른 년생이라 학교 앞 술집도 눈치보며 다니던 열아홉이 뭘 해야 하는지 알기나 했겠어요.

선배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니 술 먹다 동기들한테 털어 놓고 소문은 바람처럼 그렇게 퍼져 가고

동기나 선배들 모두 이젠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다 알고, 밀어주기도 한다 하고 놀리기도 하고 그랬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이 선생님 좋아하는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동기들이랑 낄낄대고 잘 놀다가도 멀리서 선배가 보이면 소리지르고 도망가서 기둥 뒤에 숨고, 선배들이 놀리면 얼굴 빨개지고.

선배도 그런 제가 귀여웠던지 가끔 제 이름 부르며 장난치고 그럼 전 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붙잡고 선배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하고...

 

참!

축제 때 다른 동기들은 놀러 다니는데, 밤이 늦도록 집에도 안가고 주점 뒤치닥 거리한 것도 사실 선배 언제 오나, 선배 보려고 그랬었어요.

둘째날인가 셋째날 드디어 온 선배보고 혼자 두근거리고 있었는데

선배가 술 먹다가 타학교 유교과라던 늘씬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선배들 무리랑 2차로 시내로 나가는 거 보고는 정말 기운이 빠졌었어요.

제가 얼마나 바보같이 순진했는지 전 선배가 다시 올거라 믿고 그 날 밤새 주점 정리하면서 기다렸지 뭐에요.

그걸 보던 95학번 선배가 저에게 ㄱㅌ선배 안오지, 이녀석아! 여자들이랑 갔는데!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까요. 

마지막날 축제 뒤풀이 가면서 선배가 내 어깨 두르면서 며칠 동안 수고 많았다고, 말하며 웃던 선배 숨결이 너무 가까워서

서운했던 감정 눈 녹듯이 사라지고 또 심장 두근거리며 안절부절하던 기억도 참 생생하네요.

 

지금 생각하면 선배도 참 난처했겠어요.

여자티라고는 하나도 안나는 선머슴같은 1학년 꼬맹이가 자기 좋다고 소문내고, 보이면 숨고, 티나게 기다리고, 

주변에서는 장난친다고 선배 타박하고, 어유, 정말 지금 제가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했을 것 같아요.

그런 저인데도 선배, 많이 신경써줘서 고마웠어요.

 

어느날 수업 끝나고 내려가는데 동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ㄱㅌ선배가 교문 앞에서 너 찾는다고 하던 거,

그럴리가 없다고 털레털레 내려가는데 학교 앞 음반 가게 앞에서 정말 선배가 내 앞에 나타났잖아요.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우리 ㅇㅇ이 나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민들레 1집 테이프 선물로 줬잖아요.

뒤에서 보던 동기들의 오~하던 소리보다 저 사실 너무 감격해서 눈물나는 거 참느라 혼났어요.

하교길의 그 오후 공기, 가을 끝자락이지만 하나도 춥지 않고 포근했던 그 바람, 학교 앞 상점들 불빛까지 이상하게 기억이 다 나요.

 

물론 그게 다였고,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지만, 그땐 그래서 원망도 크고 이럴거면 왜 잘해주냐며 혼자 울기도 했지만,

이제 돌아보면 스물네살의 선배도 어려운 거절을 나름 고민 끝에 서툴지만 아름답게 해준 거 같아요.

그렇게 1학년 끝내고 제가 학교를 나가지 않다가 자퇴하고 그러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학교에서의 선배와의 기억은 저 때가 마지막이에요.

참 많이 모자라고 풋풋한 짝사랑이긴 했지만 그렇게 저에게 선배는 첫사랑이었어요.

 

참! 선배 알고 있을까요?

그 기억으로 지내다가 2010년이었나, 어찌어찌 싸이월드를 헤매다가 선배 싸이월드를 발견했었는데!

전체공개인 사진 속 선배는 하나도 안 변했던데요.

여전히 술 좋아하고 당구 좋아하는 사진들을 지나 선배랑 똑 닮은 두 아들 사진까지, 저 혼자 얼마나 반가웠다고요.

그리고 마지막 사진이 검찰직 공무원 합격해서 연수받고 연수원 수료하는 멋진 정장의 선배 모습이었어요.

늘 웃어주던 눈웃음 싹 지우고 늠름하게 미소짓고 있는 선배를 보면서 와,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었다, 열심히 멋지게 지내고 있는 선배가 얼마나 반가웠다고요.

 

사실 고민을 좀 했었어요.

방명록이나 쪽지를 보내볼까, 선배가 나를 기억할까, 이거 괜한 짓인가...

그런데 선배, 있잖아요, 저 봤잖아요...

방명록을 보다가 익숙한 이름의 선배 친구들이 남긴 글들이요.

 

술취한 선배 친구가 남긴, 너 왜 그렇게 일찍 갔냐는 글,

다른 친구의 그립고 보고싶다는 글,  세상에 없지만 생일이라 글 남기러 왔다는 글.

 

2010년 그 가을, 선배는 세상에 없더라고요.

제게 민들레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왜인지 미안해하던 그 때의 선배가 정말 마지막이었더라고요.

선배랑 웃는 모습이 꼭 닮은 어린 아이들을 두고, 이제 막 검찰직 연수를 마치고 근무를 앞두고, 

그 반가운 사진들을 마지막으로 선배는 세상에 없더라고요.

 

선배.

그 날 이후 한 며칠 저 많이 힘들었어요.

96년 가을에도 제멋대로 좋아했던 선배인데, 2010년 그 가을에도 저 또 선배 미안하게 제멋대로 참 힘들었어요.

자퇴하고 그 지역 떠나 고향 와서 다른 전공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취업하느라 그 때 동기들 선배들 아무도 연락이 안되어서

선배가 왜, 언제 그렇게 떠났는지 물을 수도 없었거든요. 그걸 궁금해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 알아볼 수도 없었어요.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선배는 그냥 그렇게 내 마음에 정말 묻어졌어요.

 

선배.

저 그 때 과방에서 제 친구 좋아하던 2학년 선배랑 둘이 동맹 맺어서

나는 친구 정보를, 2학년 선배는 선배 정보를 캐오기로 했었는데 그거 모르셨죠?

선배 생일, 혈액형, 이상형, 가족관계, 선배 해병대 기수, 선배 고등학교 졸업기수, 선배 아버님이랑 동생분 해병대 기수 까지...

요즘 같으면 스토킹이라고 할라나...하여간 얼마나 달달 외고 다녔는지 선배 모르죠.

저도 이제 오십이 다되어 가서 기억은 안나지만  과방 소파에서 2학년 선배랑 둘이 달달 외며 꺄악 거리던 열아홉 저를 선배는 모르겠죠.

 

그래도 선배.

선배가 저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그 민들레 1집 테이프, 그거 아직도 있어요.

열아홉 짝사랑에, 선배가 선물했다고 울고 웃으며 늘어지도록 들었던 '난 너에게' 라는 그 노래는 아직도 들으면 심장이 이상해요.

 

가끔 누가 첫사랑 물으면 사실 선배 얘기 잘 안해요, 얘길 하면 선배가 안 계시다는 게 실감이 날까봐요.

그냥 모르던 2010년 이전처럼 아련하게 남겨두고 있어요.

 

4월이에요, 선배.

이 즈음 선배 쫓아다니기 시작한 거 같은데, 30년이 다 되어가요.

그래도 선배가 내 첫사랑이어서 고마웠어요.

천방지축 철부지 사랑타령, 투정 다 받아주고 그래도 끝까지 멋지게 남아줘서 고마워요, 선배.

많이 늦었지만 평안하게 잘 지내고 계시길 드디어 글로나마 전해봐요.

 

안녕, 내 첫사랑, ㄱㄱㅌ 선배.

 

 

 

  

 

 

 

댓글 20

댓글쓰기
  • 2024.04.25 15:53
    베스트

    https://youtu.be/pmqaiDvNR-U?si=Xd_AMtd9nFF8BMPJ

    호이님 덕분에 좋은 노래 알게 되었어예. 

    이럴때는 못본듯이 그냥 추천만 누르고 가는 것이 예의인줄 알지만 글이 너무 좋아서 자꾸 맴돌게 되네예.. 그시절 푸르렀던 호이님의 시절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려예🙇🏻‍♀️

  • 호이 작성자
    2024.04.25 15:57
    베스트
    @주윤발밀감

    감사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듣게 되네요.

    그 땐 선배가 내 마음 안 받아줘서 울면서 듣던 노랜데 지금은 또 다른 기분으로 눈물이...

    잇싸지기님 덕분에 오랜만에 열아홉으로 돌아갔다 왔습니다.

  • 2024.04.25 17:15
    베스트

    와....

    글 너무 좋네요.

    이벤트 취지에 가장 잘 맞는 글입니다.

    이 글 하나만으로도 이번 이벤트는 대성공이라고 할 정도네요.

    감사합니다.

     

  • 호이 작성자
    2024.04.25 17:56
    베스트
    @잇싸지기

    잇싸지기님이 댓글이라니...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선배를 떠올려 봤어요.

    처음으로 글로나마 선배의 평온도 기원할 수 있어서 저에게는 너무 감사한 이벤트입니다.

  • 2024.04.25 17:53
    베스트

    글 읽는동안 눈물이 ㅠㅠ

    난 너에게. 많이 듣던 노래여서 그런지

    감정이입이 많이 됐습니다. 

  • 호이Best3 작성자
    2024.04.25 17:58
    베스트
    @술럽

    그 때는 노래가사에 이입되서 듣다가 울고, 또 희망도 가져봤다가 아닌 거에 또 울고 참 어렸고 서툴렀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젠 첫사랑도 가물가물할 나이인데, 모처럼 참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퇴근하면 테이프 한 번 틀어봐야겠어요.

  • 2024.04.25 19:38
    베스트

    호이님  첫사랑이 아프군요 

  • 호이 작성자
    2024.04.25 19:47
    베스트
    @필그림

    짝사랑이었어서...

    우리가 첫사랑을 항상 기억하면서 살진 않잖아요.

    잊고 살다가 이렇게 '첫사랑'이 주제가 될 때, 새내기시절 이야기할 때, 민들레의 노래가 들릴 때면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제가 가장 순진하고 순수했을 때 정말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두근거릴 때라 저에겐 아프기도 하지만 예쁘기도 한 기억이에요.

    이렇게 글로 꺼내긴 처음인데, 많이 그립네요, 그 시절 그 공기.

  • 2024.04.25 20:04
    베스트
    @호이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살지요 ~가슴 콩닥거리던 그시절이 있었고 또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 호이 작성자
    2024.04.25 19:46
    베스트

    삭제한 댓글입니다.

  • 2024.04.25 22:39
    베스트

    ㅠㅠㅠㅠㅠㅠㅠㅠ 슬프고도 아름다운 글입니다 ㅠㅠ

  • 호이 작성자
    2024.04.25 23:12
    베스트
    @윤작자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첫사랑 사연이 아니라 좀 망설였었는데, 이벤트 통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이젠 선배가 떠난 나이보다도 훨 누나가 되어 버렸는데도 오늘 하루는 열아홉의 저로 잠시 살아봤네요. 

  • 2024.04.26 00:51
    베스트

    와. ㅜㅜ

     

  • 2024.04.26 08:11
    베스트

    아후... 가슴이 울렁울렁.

    눈물날 것 같아.

  • 2024.04.26 11:44
    베스트

    ㅠㅠ

  • 2024.04.26 12:49
    베스트

    오래전 첫사랑의 달고 쓴 맛이 새록새록하네요. 눈물도 찔끔나네요. 넘 좋은 글이었습니다

  • 2024.04.27 00:35
    베스트

    눈물이 핑.

    아련한 기억들이 살아나네요.

    "그댈 너무 사랑하니까"

  • 2024.04.28 04:43
    베스트

    순정 에세이 한편읽었네요 

    50된 골드미스 짝사랑하던 선배가 다른여자 사귀는거보고

    충격으로 출가할뻔 했다던 직업이 선쌤이신 여인이 새삼 생각~

  • 2024.04.30 17:05
    베스트

    지금 봤어요....

    호이님 첫사랑 넘 예쁘고 아름답고 그리고....가슴이 저리네요....

     

  • 2024.04.30 20:39
    베스트

    두번째 읽습니다

    혼자 만의 짝사랑이  얼마나힘들고 아픈지를  느낄것 같아요

    저기 그림자만 보여도 심장이쿵쿵쿵

    좋아하면 멀리서도그분만 보이는 짝사랑

    지나다니는 동선을 보면서  웃었다 즐거웠다아팟다  표현할수 없는  마음  느낄것 같아요~

    아흐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