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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작문/소설/대본] 주변인 3
2022.12.0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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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714047

트로츠키는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혁명가로 살아왔다고 했던가. 난 의식을 깨친 이래 30년의 생애를 읽고 쓰고 하는 소일로 보냈지 싶다. 물론 보고 듣는 소일은 4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초중딩과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난 듣고 보는 것에 집중했지 싶다. 그러니까 라디오나 티브이(극장)를 통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쿵(반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았다. 148인가 그랬다)을 통해 마빈 도케이어가 지은 '탈무드'와 '유태인 5천년간의 지혜'를 빌려 읽고서 의식적으로 개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독서, 즉 읽는 것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 짝쿵이랑 얘기를 나눌 때면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이유가 뭘까, 하는 고심 끝에 짝쿵이 모태신앙이고 탈무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길래, 책(탈무드)을 빌려 읽고서 그 비밀을 점차 알게되었다. 그 친구는 모태신앙이다 보니 성경을 통해 추상(수학)적인 것에 무척 강했다. 그러던 차에 학교(입시) 공부에 염증(맨날 암기하는 것에 싫증이 났다)이 났고, 시험 공부를 멀리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소설책과 시를 읽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학에 낙방하고 그 짝쿵이랑 재수 시절을 함께 했다. 같이 독서실을 다녔는데, 그 친구는 정일학원(종합학원)을 다녔다. 근데 난 학원도 다니지 않으면서 독서실에서만 공부했다. 이유는 학력고사 공부는 하지 않고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재수 시절엔 시론(팡세, 수상록 등등)이나 사르트와나 카뮈의 책들을 독파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독서실 책상엔 팡세나 수상록, 그리고 사르트르나 카뮈의 글귀들을 포스트잇으로 도배했다. 그 친구가 종합학원에서 돌아와 독서실에 오면 내가 써논 글귀들을 보며 걱정했다. 아무렴 어떤가! 시험공부는 재미없고 책읽는 게 좋은 걸. 암튼 그때 그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 점점 더 그 친구를 압도하게 되었다. 근데 문제는 쓰기가 안 되었다. 내가 맘에 드는 글귀는 쏙쏙 노트화시키는 것은 잘 했는데, 나 스스로 시론이나 소설 및 시를 습작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8년 고딩동창(대학원생) 녀석의 부탁(자기 여동생의 레포트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으로 처음 글다운 글을 쓰는 원년이 되었다. 그 레포트도 일주일 전 과제였는데, 레포트를 제출하기 하루 전 날에 부탁했다. 하여간 그해 초여름 어느 일요일에 난데 없이 고딩동창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친구는 불교미술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다니던 친구였다. 자기 여동생(중어중문학)이 레포트를 다음 날 제출해야 하는 데 레포트를 대신 써 달라는 것이었다. 참나 대학생이 자신의 레포트도 못 쓰다니! 하기사 고딩동창 녀석도 대학에 다니던 시절,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 대한 레포트를 나보고 써 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대부분 대학생들이 어려워 하는 레포트는 교양 과목인가 보다. 그 친구도 자신의 전공 과목에 대해서는 공부를 해서 그럭저럭 학점을 유지하고 대학원에 간 친구였지만 자신의 분야가 다른 교양 과목은 어쩔 수 없이 레포트를 쓰는 데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대학생의 수준이라면 자신의 레포트는 작문을 해서라도 스스로 쓸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지 대학생이지 않는가. 그 친구의 여동생도 중국에 2년 동안 유학(순전히 어학 때문에)을 갖다온 뒤에 D대에 편입했는데, 중국어를 웬만큼 하니까 편입이 이루어졌나 보다. 교양 과목을 듣는데 중어중문학과 강사가 루쉰의 수필집(제목을 잊어버렸음)과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그리고 백무산의 한 시집을 읽고서 자신이 느낀 바를 적어오라는 레포트였다. 그 친구 녀석은 동생이 쩔쩔매는 것을 보고 철학과 문학으로 무장한 날 떠올린 것이다. 동창 녀석은 대뜸 전화상으로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여동생 레포트 좀 써 달라고 부탁을 해온 것이었다. 아마 친구의 여동생은 맨 먼저 오빠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대학원도 다니겠다, 또 예술 분야에 종사하니까 오빠가 써줄 수 있겠지 하면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 녀석도 쓸 재간이 도통 없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 녀석은 그 당시 내가 겉도는 인생을 사는 게 안타까웠던 나머지, 날 보면..."넌 제도권에 들어가야지 네가 빛을 볼 수가 있다고" 말하던 녀석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바라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네 혼자 잘 났다고 떠들어봤자 소용이 없다면서, 진정 너의 생각들이 인정을 받으려면 아무리 더럽고 추잡해도 제도권에 진입하여 펼쳐야 된다고 타일렀다. 아무리 이 세상이 잘못 되었다고 우리에게 하소연해봤자 소용없다고 말이다. 즉 네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네트워크)들과 어울리면서 너의 생각을 펼치다 보면 언젠가 네가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항상 말하던 녀석이었다. 근데 난 유년시절부터 아웃 사이더 기질이었지 싶다. 끝까지 아버지와 불화를 겪는 것도 결국에 이와 같은 나의 완고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https://youtu.be/8ELnhjGw4Zs

 

20년 전 즈음 글이다...내 나이답지 않게 정신과 감성은 4*50대가 갖고 있는 추억 속 낭만과 회상을 견지하고 있었고, 내 육신은 서른 고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내 또래들과 내 감성과 관심사를 얘기할 만큼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주변인으로 지내고 있다. 내 또래의 젊음들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기에는 이미 정신적으로 그들과 다른 감성 체계와 지적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문학과 철학, 영화, 음악, 그밖에 문예 일반에 대해 같이 공유할 벗이 내 곁에는 언제나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내가 찾지 않았고, 늘 혼자서 즐기는 데 천부적이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나보다 나이 많고 교양으로 철철 넘치는 어르신들과 놀기에는 애당초 내 육신이 너무 젊었기에 항상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나 '주변인'이라는 딱지를 마음 속에 품고 - 헤스더가 주홍 글자,'A'를 가슴에 달고 다니듯이 - 여태껏 살아왔다.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각별한 문예향락(영화나 TV 문예물에 친숙했던)적 취미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제나 TY 수상기 화면으로나마 영화나 TV문학관(난 초등시절부터 거진 우리 나라의 유명한 단편 소설 - 현진건, 이상, 김동리, 황순원, 김승옥, 황석영,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 주요섭, 유진오, 염상섭, 채만식, 선우휘 등등 - 들을 다 섭렵했다.)에 내 몸과 정신을 노출시켰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선 알싸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묘한 감동(그때부터 비극적인 삶에 경도되기 시작했다.)이 날 엄습해오곤 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감수성 체계는 그렇게 자리를 잡게 되었나 보다. 

 

그 당시, 난 애석하게도 활자(책)로 된 매체를 접할 수가 없었다. 읍내(강원도 철원)에서 초*중등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나로서는 도서관을 구경도 못한 촌놈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집안 구석에서도 문예물 서적 한 권 눈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워낙 문예물하곤 친숙한 분들이 없었기에 그럴 것이다. 형제(남동생이 있긴 있었지만, 말 못하는 반벙어리에다 장애인이었다.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다.)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형이나 누나들이 보던 구닥다리도 있을 텐데.

 

그렇게 중등시절까지 TV로나마 나의 문예물에 대한 감식력을 키워나갔다. 그랬을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었건만 문예물 같은 서적을 접해보지 못했기에. 그 당시 글쓰기에 대한 감각이 자라지 못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고작 내가 읽었던 것은 '소년중앙'정도였다. 매일 돈이 조금씩 모일 때마다 서점에 가서 소년중앙을 육실라게 사서 보았다. 또한 내 주위에 그렇게 문예물에 대해 특별히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던 벗도 없었기에 나의 문예적 감각과 글쓰기는 굼벵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문예적 감각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내 짝쿵은 반에서 유별나게 머리가 좋았던 친구였다. IQ가 얼핏 148인가 했다. 그 친구는 모든 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남달라 보였다. 왜, 그랬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그 친구는 모태 신앙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유태인들의 몸과 다를 바 아니었던 '탈무드'라는 지혜의 책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것을 반추해 보는 것은 내가 그 친구에게서 탈무드라는 책을 빌려 읽고서 많이 개안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리라. 

 

그 이후로 난 독서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닥치는 대로 유태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으며 유태인들의 위대한 창의성의 비밀도 조금씩 알아갔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냥 흘러갔다. 아무런 의식 없이 정규 교육의 12년 세월 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곤 알량한 지식 덩어리를 머리 속에 간직한 채 졸업을 맞이 하였다. 

물론 대학에 떨어진 나로선 재수를 하게 되었고, 내 자신을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간 그 친구와 함께 독서실에서 재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종합학원(정일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난 홀로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저녁에 그 친구랑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재미로 재수 생활를 그럭저럭 보냈다. 

그 기간 동안, 솔직히 난 입시 시험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문학과 에세이의 고전들을 읽으며 책읽는 재미에 흠뻑빠져 보냈다. 그렇게 나의 고전 섭렵은 무섭게 시작되었다. 

 

문고 시리즈로 학원사에서 발행되는 문고판을 틈틈이 사서 읽어 보았다. 그때 읽은 서적이 대부분이 불문학 계통이었다. 작정하고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불문학 관련 서적에 손이 많이 갔다. 

 

몽테뉴, 파스칼, 스탕달, 발자크, 위고, 졸라, 모파상, 지드, 사르트르, 까뮈 등등. 그 밖에 나의 우상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랭보와 보들레르의 시집을 차례차례 탐독해 나갔다. 그래도 체계적으로 불문학에 대한 족보를 알게 된 것은 랑송의 <불문학사>를 통독하면서 부터였다. 

 

불문학을 웬만큼 읽고 난 다음에 세계 문학사에서 고전으로 유명한 소설들을 쉴 새 없이 읽어 나갔다. 물론 입시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새 내 자신은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의식이 싹텄고,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가치관과 세계관이 서서히 정립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고딩학창시절부터 똑똑했던 그 친구랑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몸소 느낀 바가 커서 그 친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었지만, 책을 많이 읽고 난 후에는 점점 그 친구를 앞질러 가고 있다는 것을 재수할 동안 그 친구의 놀라운 표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내게 이런 말("재우야! 그런 것은 너무 위험한 생각이지 않니?")을 하며 우려 어린 표정을 짓곤 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독서(책)란 나의 모든 잠재된 재능을 열어주는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있다. 책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맹렬한 지식욕으로 날 불태웠다. 아울러, 극히 어둔운 세계관에 부지불식 간에 침윤되어 가고 있었고, 주체할 수 없는 상상력이 또아리를 쳤고, 이름 모를 답답함이 날 억누르기 시작했다. 

 

유년시절 멋모르고 보았던 영화나 문예물에서 영향 받았던 잔상들이 조금씩 나의 머리 속을 뚫고 폭발할 듯이 감각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것을 지금에 와서 유추해 보면 나의 잠재된 무의식의 형태로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유년시절부터 낙관적인 인생을 배우기 이전에 문예적*비극적 감수성으로 날 옭아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다 그렇지 않았던가?! 그 작가가 비극적이고도 위태로운 생의 아픔을 경험한 이후에 자신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글쓰기의 형태(소설이나 시)로 형상화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정신 못차리고, 먹고사는 문제(솔직히 나이가 들수록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를 보거나, 돈버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는 인문학 관련 책들을 들추며, 시시때때로 음악을 들으며 나의 감수성 체계에 맞게 날 후천적으로 길들였고, 조금씩 비극적 세계관에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본능적으로 비극적 실존주의에 나의 인생관은 맞닿아 있었다. 지금에서도 그러한 도저한 의식을 떨쳐버리기에, 난 이미 그런 것에 많이 노출되었다. 

 

아무렴 어떤가. 언제나 주변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로선 이런 것으로 내 못난 생을 위안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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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YDADDY
    2022.12.08 08:48
    베스트
    삭제된 댓글입니다.
  • 이지튀르 작성자
    2022.12.08 09:00
    베스트
    @DYDADDY 블로그보다 페북에 쓴 포스트가 더 많을걸요...ㅎㅎ
  • DYDADDY
    2022.12.08 09:06
    베스트
    삭제된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