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2022.10.22 04:36
115
5
https://itssa.co.kr/1046206

1654891628013.jpg

 

오래 전, 나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여대생(은 나랑 썸을 탔지만)은 내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처럼 그렇게 살 거였으면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고 말이다. 또 어떤 이는 내가 틀림없이 자살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자살할 용기가 없기에 꿋꿋이 살아 있다.

 

기형도의 시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10월의 시구가 있었다..."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한때 정말 그러했다. 내가 기형도 시인을 처음 인식한 것은 재수나 삼수 시절,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서였지 싶다. 군대 시절 첫 휴가를 나갔다가 부대(신도안) 근처 서점에 들렸는데, 우연찮게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시집을 들추며 읽자마자, 그의 시구들이 내 맘을 사로잡았다. 

 

지금 기형도는 가고 없지만, 아직도 자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이 이 땅에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형도 시인은 천상에서라도 그 행복감이 밀려올 것이다. 

 

꼭 시인은 어렵게 살고 일찍 죽어야 하는 당위성은 없다만, 그 낭만적 감상을 떨쳐버리기에 시인이라는 그 독특한 에네르기가 예술과 문학의 장에서 아우라를 풍긴다. 게다가 시들의 어조가 어두울수록.

 

기형도의 시가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증거는 아마도 그의 시에서만 느껴지는 독특한 정서(그것이 병적 낭만주의든, 공격적 허무주의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 김현의 평가 - 이든 간에)에 기인할 것이다. 

 

그건 기형도가 표현한 시어들의 음색이 당시 다른 시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싯구들 사이의 어감과 정조, 리듬, 강렬한 색조(죽음, 우울)를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주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무엇보다 그의 진실된 감성이 시 속에 성공적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기형도는 실제적으로 부재하지만 청춘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문학도들에게 그의 시는 마르지 않는 넥타르로 작용할 것이다. 

 

"한 편의 빼어난 시가 우리의 눈가에 눈물을 고이게 만들 때, 그 눈물은 기쁨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극된 향수, 간절한 청원, 불안정한 세계(현세) 속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얼핏 그 낙원을 바로 이 지상에서 즉각 차지하고 싶어하는 천성의 증표이다."  - Ch. 보들레르 -

 

+

 

10월

 

                             기형도
 
                 1
 
흩어지는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댓글 0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