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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17 02:09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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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435763

인터넷 여행을 시작한 지도 햇수로 언 24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여러 사이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어왔다.

 

그 시간 중에 내가 정말 반 미치도록 좋아했던 한 여인이 뿌려놓은 글들의 풍경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녀가 수놓았던 글의 자기장에 이끌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가 뿌려 놓은 글들의 풍경과의 첫 만남은 2000년 아니면 2001년 어느 봄날이었던가? 장소는 어느 시인의 개인 홈페이지에서였다.

 

그토록 강한 에스프리와 글 자체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색채에 매료당하기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후, 고딩동창 녀석의 사촌 누님이 건네준 전혜린의 수필집(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 첨이었다.

 

그리고 무조건 만나보고 싶은 갈망에, 그 분의 글에 댓글을 달았고, 꼭 만나 보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난 어리석게도 메일 주소나 연락처를 남기지도 않은 채, 그녀의 글을 읽고 흥분한 나머지, 그렇게 글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난 그때 그 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른 후(그 해 일 년이 지난 후, 그녀는 다음 해 봄이 지나갈 무렵까지 일년 동안 그 게시판에서 보이질 않았다.)에 뚜렷이 **님이 여성이란 걸 알았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난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 혼자 골몰히 문학에 전념하며, 장차 멀리 비상하기 위해 날개짓을 하는 분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만 품은 채. 그러고 시간이 흘러, 난 그녀가 대학생이며, K대 법대에 다니는 재원이며, 유명한 문예지 출판사의 대표로 계시는 분의 여식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21년 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연찮게 그녀와 첫 대면한 적이 있었다. 라니 홈페이지 식구들이 영화모임 오프(그때 을지로 중앙극장에서 슈렉을 봤지 싶다)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도 위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그저 단순히 문학에 전념하는 소녀겠지 하는 생각만 품었다. 

 

그녀의 글을 너무 좋아했고, 그녀를 만난 이후로 더더욱 그녀가 좋아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뒷풀이 자리(서로 옆자리에 앉았음에도)에선 몇 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다. 그저 직접 그녀를 보았다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나중에 연락(전번을 주고 받았지만)을 하고 싶어도 나의 치유할 길 없는 수줍음 때문에 연락할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달(?) 후 한여름, 라니 홈식구들이 부산 해운대 근처에서 시낭독회 겸 모임을 가졌을 때,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이미 그녀에겐 남친(의대에 다니고 있던)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 남친이 자취하는 방에 떼거거지로 모여 음주가 곁들인 문예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 남친은 자신의 여친(내게 사진을 보여주었는데)이라며, 바로 그녀였다. 임자가 있으니 넘보지 말라는 뜻 같았다. 아니 둘 사이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허탈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이후 난 라니 게시판에 올라오는 그녀의 글에 일절 댓글도 달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괜스레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던 차에 라니 홈페이지에서 날 잘 따르던 대학생 여동생과 옥신각신했다. 어찌보면 별 일도 아닌데, 상대방 여동생이 게시판에서 너무 오버하기에, 급작스레 상황이 꼬이고 난처하게 돌아갔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고가길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나 또한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와중에 그녀에게서 뜻밖에 전화가 온 것이었다. 전화벨 소리와 함께 뜬 그녀의 이름을 보자마자, 심장이 뛰었다. 전화받기가 몹시 난처했지만 받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수화기에선 그녀는 날 이런저런 말로 위로하며, 호칭을 '재우 오빠'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더더욱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자세한 전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마냥 듣기만 했다. 그 이후, 더 이상 전화통화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난 그녀에게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전에 내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첫사랑의 소녀와 생년은 달랐지만, 우연히도 생일이 같았기에 알싸한 감흥에 젖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더 흘러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졌는데, 어느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난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그녀는 그 기억들을 애써 외면하고 그저 형식적 인삿말만 남겼다.

 

우옛든 밑에 그녀가 뿌려 놓은 색채, 강렬한 에스프리와 뇌쇄적인 글들의 풍경을 덧붙여 첨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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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슬픔이란 단어는 마음에 들지 않지. 책임질 수 없이 끈끈한, 세계와의 유대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단어 군 중의 하나. 슬픔이라는 단어에는 어울리는 어떤 사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너무 통속적이어서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헐겁고, 버거운 느낌이 교차하기도 하고. 한없이 담담하기도 하다. 감당하기 힘든 밤의 반짝임. 윤기 흐르는 낙원이라든가 하는 것은 너무 멀리 있어, 어쩐지 버석거리기도 하고 사금이 널린 강에서 참 오래 헤매는 느낌이야. 

오래 전부터 느낀 거지만. 삶은 메마르게 잎새 하나를 떨구고, 그 위에 천년 만년 나무 한 그루와 눈의 고독을 쌓고, 그리고서 각자 깊은 잠을 자다가 몇개의 생물들의 부패를 목격하며 꼼지락대는 균열과 생의 착각 속에서 함께 도란거리며 밤을 지새우면 그것이 길. 오랜 동면의 환상 속에서 모든 것은 바쁘고 빡빡하게 혹은 한없이 고즈넉하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일들은 이루어져가고. 그 계절은 끝나며. 

삶은 그렇게 시들어서 서서히 가는 기적 소리에 빗겨서. 

잠을 자면, 곧 아침이거나 밤일 텐데. 모두들 너무 긴 여행을 가서, 그것은 거의 슬픔이라고 불리는 백지 상태로, 허허롭지 않은 공존의 시간. 

오래도록. 그렇게 기다림. 

*홀로 견디는 일의 우주 

삶은 끈끈하다. 그물들의 바다. 던져지면 누구든 그 안에서 꿈을 꾸며 밖으로 나가길 원하는데 밖은 아무 것도 존재하질 않아 온통 바람 뿐이다. 죽음은 삶 안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는 불안함 속에서 저마다 반짝인다. 개별자들은, 자신의 불안 속에서 세계를 그리며, 눈을 감는다. 

그런 때 새까만 고독은 광활하게 다가온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아 자유로운 자들은 그것을 철저히 혼자만 껴안고, 삶과 죽음 양날 옆에서 오로지 홀로 지고 버틴다. 뜨고 지는 별과 달이 모두 그러한 것처럼. 피고 지는 하찮은 것들이 흘리는 흔적만큼의 사소함이여. 

우리는 모두 인간의 자식이다. 가끔, 찌르는 듯한 작열감 속에서 세계는 한덩이의 거대한 아픔이 되고, 그것들은 내 안에서, 어떤 시원의 갈증을 낳는다. 그때 시를 쓰고 싶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 단지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

*일상의 무게에 대한 의문 

이상한 적의의 무게가, 살아가는 틈틈히 내가 쌓아온 벽과 벽에 의해 실려 올때, 좁혀오는 현실의 틈 사이에 공허의 촉수가 단단히 뿌리 내릴 때. 발작적인 충동보다 서서히 우리를 옥죄는 기억과 미래가 더 무섭게 그러나 더 담담하게 느껴질 때. 

그럴 때가 있지. 모두가 언제나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끼면서 생존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현실의 무게와 맞먹으며 각자를 압박하는 매 시간 시간을 기쁨이라고도 고통이라고 결코 심플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 

무엇이라고 이름짓지 아니하여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이 가는 길이 무엇을 향해 뻗어있는지 모르나, 항상 달려가야 한다는 주어진 믿음을 조금씩 구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나이. 자신을 속이지도 않고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알기 시작하는 나이. 그러나 모든 것은 그렇게 순진하지도 반짝이지도, 그러나 모든 것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충분히 근심스럽지도 않다는 것, 그러나 모든 것은 그렇게 무겁지도 그렇게 가볍지도 않다는 것, 그러나 모든 것은 환상이기도 하며 아니기도 하다는 사소한, 미래에 대한, 아주 사소한 경멸이라는 것을, 그 일상의 잔인함을 견뎌내는데 너무나 익숙해져가는. 일종의 건강한 불감증. 

삶이란 누추한 집 아래서 살비듬 떨어뜨려가는 또하나의 누추함 속에서 인간들은 무엇을 위해 자아라고 불리는 견고한 담을 쌓게 하며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믿게 하는가. 행복의 이데올로기는 어째서 행복의 맹목을 위해 우리를 서서히 마모시키는가. 환상을 위해 팔리는 몸값은 우리의 일상보다 값진 것인가. 모든 기억은 낙관주의의 미래를 향해 맹렬히 봉사하는가. 그러나 우리 밖의 울타리는 우리 안의 울타리보다 강하게 사람들의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데 봉사하고 있으며. 이 생의 황폐함이 우리의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향해 끊임없이 봉사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모든 고통의 실존이 곧바로 생존이라는 자본주의의 전쟁 속으로 침수시키며 모든 덫은 우리와 무관하게 우리와 유관하게 이 시간에도 돌아가고 있다. 

모든 형태의 죽음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뭘까. 

나에게 묻고 싶다. 내가 향해 가고 있는 곳은 어딜까. 

삶이 지탱해야 하는 무게는 뭘까. 
가끔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계획하는지. 무엇을 위해 믿는지. 무엇이 무엇에게 무엇을 허락했는지. 

혼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돌린다는 것은 백치에 가까운 인간에게는 정말로 무거운 일이다. 혹은 세계 밖에 존재하거나. 

단지 그뿐... 

*언제나 기억하지 않는 시간대의 일

갈증은 어떤 내밀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떨림은 가끔 폭발적으로 시작된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상의 모든 사소함의 반복들은 살아있는 자의 힘을 소진시켜, 나른하다못해 지루하게 한다. 생명은 시드는 듯하고 많은 피곤이 나를 잠으로 몰아간다. 이유없이 깨어난 다음이면 적막 속에 갇혀, 적막의 사각형을 파괴하고픈 난폭한 충동에 젖게 한다. 

그것은 어떤 우울함의 촉수가 극도로 예민해졌을 때의 일 

그러므로 언제나 기억하지 않는 시간대의 일 

삶 뒷 편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죽음의 날마다의 기록, 날마다의 하찮은 사건. 모든 말이 무의미해지는 회심... 용서받지 않는 현실과의 세심한 불화 

포복해서 많은 빛의 날들로 기어가야하리라. 나는 빛의 날들로, 그늘을 무심히 지나쳐가는 법을 배웠으므로 

삶은 내게 갈증을 준비하였다. 나는 그것들을 심어놓은 신에게 감사하며, 때때로 증오하며, 오랫동안 꾸준히 걸어갈 예감 속에 잠든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내 촉수 바깥에서 안쪽으로 오그라드는 사건 

*풍경2

지연되고 있었다. 

모든 사건이, 모든 표정이, 모든 삶과 죽음의 사소한 그림자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시시 각각의 흔들림이 있었다. 미세한 진동의 크기를 느끼는 자에게는 그것은 이미 푸르른 예고였다. 무한한 하늘 밑에 까맣게 자리한 내가 모르는 집들과 지붕들, 불안하고 아름다운 구획. 

굉장한 더위였다. 여름은 길들을 따라 난 나무에게나 사람에게나 한껏 지열을 뿜어대게 하였다. 기다림 역시 지친 시간을 향했다. 멀리서 도착하는 하늘. 구름들의 뒤바뀜... 길고 작고 크고 작은 반향들. 장난스럽고 천진한 제스춰. 그물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존재의 잔상. 불안한 경적과 어떤 기억. 

사물은 낯익은 모습을 하고 희미해져 간다. 이렇게 축축한 바람과 이렇게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이미 그것은 예고되고 있었다. 약속은 그들에게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삶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림자는 넓어져, 잎사귀 틈새에서 빛났다. 눈물은 얼음의 체온으로 한 가운데서 감지되었다. 

*풍경3 

바람은 습기에 차 있었다. 어디에서인지 모를 사소한 절망이 한적히 불어왔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 빛나는 것은 미동 없이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의 그릇. 나무는 깊은 데서 끌어올린 침묵으로 단정한 선을 흘리고 있었다. 잎새 사이로 불어오는 뜨거움 속에 간혹 거꾸러진 벌레들이 보였다. 모든 게 자기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사물은 사물의 그림자 안으로 한없이 칩거하며... 

오랜 동안의 꿈 속에 하얀 구덩이를 보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늙은 노인의 가느다란 몸뚱이도. 눈물은 궤도를 향해 연이은 방점을 찍었다. 삶은 하얀 갈증 속에 결정되어 가고 있었다. 감각 속에서 그것은 무한히 자유로왔다. 드디어 먼데서 경적 소리와 함께, 그는 잠시 죽음으로 이행했다. 바람은 생채기를 따갑게 쏘아가며 천천히 가벼워져가고 있었다. 

*풍경4

비는 따갑게 눈을 찔러댔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온통 벽뿐인 운명 속으로 발은 조심스레 떼어놓았다. 세계는 낡은 벽 사이에 틈을 넓히며 내 앞에 '잠시' 주어졌다. 나는 고무로 된 상처가 곧 습습하게 녹아내릴 것을 이해했다. 틈은 거세게 벌어지기 시작했고 열기 속에서 불빛은 검거나 붉었다. 틈은 점점 넓어지며 어둠보다 강렬히 빛났다. 여름이 왔다가 꺼져버릴 동안, 그들은 한동안 내게서 멀리 서있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일종의 敵意였다. 서서히 꿈으로 뒤바뀌게 되는 종류의 느린 敵意, 미세한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게하는 슬픔의 敵意 
빗소리가 거세어지면서 머리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거리낌 없이 모든 사물들의 존재 속에 내던져진 시간. 그들에게로 떨어진 거리는 조금도 변함없이 내 침묵을 돋우웠다. 파문 속에, 동그랗게 공기가 말려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어둠의 입자인 엷은 그늘을 벗어나, 꿈은 내게로 오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힘-동의와 주관과 객관의 대척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현실과 현실에 대한 주관적 반응 양식만큼 그 사이의 괴리라는 것을 없애거나 한쪽이 한쪽과 정확히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객관과 주관의 완전한 일치가 힘들다는 것 말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본연적으로 주관적이기 쉬운(즉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아도 원천적인 감성적 추동들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하는)존재에겐 더욱 그러하다. 

'객관적으로'라는 말도 언제나 조금씩은 주관적으로 들린다는 것.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적인 현실 인식이 주관만 과잉된 상태의 왜곡된 像보다 일차적인 자연과 인간의 이해방법론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후자를 필요로 한다. 또한 전자인 척 해도 사실은 후자가 되는 것이고. 후자만 앞세우면 바닥도없이 허공에서 뜬 구름잡는 형국이기 쉽지만 전자가 설치는 시기는 후자가 부각되고 금세기는 그런 세기였던 거 같고 

어찌되었건 주관=객관에다가 
강력히 공헌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성인(이하 그냥 보통인이라고 하겠음-_-;)의 평균적인 동의지점이다. 다수가 동의하고 다수에 의해 어느정도 공인받은 것이 진리의 기호를 단 정보로 유통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절대 진리란 존재하기 힘든 사상의 자유시장에서는 더욱 그러하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대충 사회 내에서 대화가 이뤄지는 전제이다. 

예를들어 모두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전제나 판타지들을 일일히 이의제기하거나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사건에의 반응양식은 역시 보통인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반응은 언제나 보통인의 사건 인식을 기준으로 과잉하거나 과소하다고 평가되는 것이므로 도저히 그 보통인을 과도하게 상회하는 것은 병적으로 진단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준을 그 보통인이나 학계에서 동의하는 어떤 지점을 넘은 병적 개인에게 두고, 그 자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실제 들뢰즈 등도 그래왔던 거 같고). 어쩌겠는가. 이러한 문제적 반응양식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서 그를 피곤하게 느끼거나 그가 사회를 피곤하게 느낀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정상을 초과하는 왜곡된 반응은 그 자체로 에너지 소모가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에너지 별로 소모하는 줄 몰겠어라고 습관화된 과잉 에너지의 소유자는 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별로 할 말 없어지는 것이겠지만-_-; 다 자기 세계 안에서는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아무리 정신병자라하더라도 특히 그렇다) 

보통인의 사건 인식이 정확하단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힘만이 예외다.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병리학적이라는 지식을 사용해서 진단하는 자들, 배후에서 그들을 병자로 인식하게 하는 힘이다. 사회적인 힘, 동의가 이뤄져서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게 한다는 일치된 인식과 지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다. 객체로서 진단받는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대면케하는 외부적인 의사-지식-힘-동의지점 기타 등등으로부터 자신의 문제를 종용받는 셈이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치유의 드라마는 결국 상호작용 가운데 그러한 힘에 의해 추동된다 볼 수 있다. 그것이 또다른 딱지를 붙이는 상처를 만드는 과정으로 되지 않게 하고, 그야말로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고 스스로 노력하여 고리를 끊도록 하는 계기가 되게 서로 조화롭게 인격적 대면을 갖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힘은 힘일 따름이지 가치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의 힘이 내부의 힘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힘은 힘이므로 괴로운 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더욱 다수의 동의에 의해 생존할 권리가 박탈당하는 천편일률적인 마이너리티 부재의 압력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https://youtu.be/RWn9ocrMhlE

 

그녀는 엘리엇 스미스를 좋아했던 걸로 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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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7 02:15
    베스트

    이게.... 뭐고.... 머리야....

  • 이지튀르 작성자
    2022.09.17 02:17
    베스트
    @마침내 때마침, 윗 글을 읽자니
    머리가 아프셨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