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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작문/소설/대본] 지적 성감대, 엄마와 영화관 1
2022.09.0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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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274402

9년 전 청명했던 어느 가을 날, 원주에서 아침 시외버스로 이동하여 춘천 CGV까지 가서 '시네마 천국'을 조조로 보았다...원주의 극장에선 상영하는 곳이 없었기에, 부득불 춘천까지 이동했다...극장 안은 동갑내기 사촌과 나, 그렇게 단 둘이 보게 되었다. 사촌은 감동적인 영화를 보게 되어 고맙다고.

 

이십 년 전 즈음,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커뮤니티, '지적 성감대' 방에서 바가본드 님이 쓰신 글인데, 그 당시 바가본드 님은 아리따운 연극배우셨다. 그 해에 바가본드 님을 지적 성감대 오프 모임(인사동)에서 우연찮게 뵈었는데, 나도 모르게 움찔한 정도로 미모가 청아하셨다. 바가본드 님은 잘 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엄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난 바가본드 님이 보고 싶다. 아래의 글은 바가본드 님이 '지적 성감대'방에 남기신 글이다.

 

+

 

엄마와 영화관...어린 시절 내 엄마의 모습은 무섭다는 거였다.
신경질 잘 부리는 엄마.
화 잘내고 소리 잘 지르는 엄마.
잘 삐지는 엄마.
잘 우는 엄마.
그래서 다가가도 싶어도 다가 설 수 없었던 엄마.

하지만 좋은 기억도 어렴풋이 내게 남아 있다.
노래 잘 부르던 엄마.
음악을 좋아하시던 엄마.
이야기를 재밌게 잘 하시던 엄마.
영화를 좋아하시던 엄마.
그런 엄마의 기질을 닮을 것일까
엄마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이어 받아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우고 27살에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딴따라가, 그것도 연극배우가 되었다.
어린 시절 무디다고,너는 왜 이리 나를 안 닮았냐고 구박받으며 살았었는데
그래서 친 엄마가 아닌가 보다고 상처받기도 했건만 판에 박은 듯 닮은 얼굴은
어린 내가 보아도 진정 모녀였었다.

어쨌거나 그런 엄마에게 또한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영화관람이었다.
쌀값은 외상으로 먹을 지언정 극장에는 프로가 바뀌면 언제든지 갔었으니까.
어린 내가 생각했어도 그런 엄마가 걱정스러웠다.
"동네 사람들한테 영화관 다녀 왔다고 자랑하면 안돼. 알았지?"
"왜?"
"여기 저기 외상값 깔려 있는데 영화보고 왔다고 해봐라.영화 볼 돈 있으면 외상값부터 갚으라고
난리 칠거야.그러니까 말하지마.안그러면 맞는다!"
하지만 소문은 금새 동네에 퍼진다.
동네 아줌마들 아무개 집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다보면
무성영화 변사가 따로 없다.
누가? 
우리 엄마가!
당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어쩜 저리 맛깔스럽게 얘기도 잘 하시던지.
사람앞에만 서도 얼굴이 벌개지던 내게는 부러움이 대상이었었다.
내가 볼땐 외국사람은 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배우들 이름은 어쩜 저리 잘 외우고
영화 제목이며 내용이며 배우가 입었던 의상까지도
스크립터마냥 정확하게 머리속에 기억하고 계셨던 지.
넋놓고 엄마를 쳐다보던 아줌마들을 보면서 엄마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철했다.
한 며칠은 외상지고 다니기 힘들었으니까.

텔레비젼이 집집마다 없던 시절이고 보니
엄마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영화관으로 갔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간 듯한데
한 극장에 상영관이 두 개가 되다보니(2류 극장인 듯 싶다)
동네의 다른 단골극장을 거쳐 제자리로 오면 극장 프로가 바뀌어져 있었다.
엄마 덕분에 영화 구경을 많이 하긴 했는데,정확히 기억나는 영화는 없다.
원래 기억력도 없는 데다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의 일이니 더욱 가물거리겠지.
단지 영화관내에 풍경들은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스크린에선 슬라이드광고가 찍혀 올라갔었다.
광고 내용은 무슨무슨 양복점,아무개 안경점,양화점,사진관..등등
(돈들인 광고는 그나마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빨간색 화살표가 그려진 약도와 함께 스피커에서는 유행음악이 나왔었다.
그 탓일까.
유행가라도 자주 들으니 음감이 발달하나보다.
듣는 귀가 남보다 둔하지 않다.
모전여전이겠지.

슬라이드가 제대로 올라가는 날이면 별 상관은 없지만
슬라이드가 멈추거나 하는 날이면 징크스인 듯 상영도중 영화가 멈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관내가 난리가 난다.
영사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인기가 있는 영화일수록 사람들이 더욱 더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야하다싶다거나 중요하다싶다는 곳에서 꼭 필름이 끊긴다.
그러니 야유가 더 심할 수 밖에.
이럴 때 꼭 나타나는 사람.
오징어와 사이다, 계란,김밥등을 메고 다니며 애국가가 울리기 전까지 극장내를 누비고 다녔던 아저씨다.
날오징어를 갖고 와서 구워 달라고 하면 얼른 나가서 구워 오곤 했던 것 같다.
애국가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때 사람들은 애국가가 들리게 되면 삐적 삐적 눈치보며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 후렴쯤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아저씨를 보면 나쁜 아저씨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같은 어린이도 잘 일어나는데 어른이 왜 안 일어나지?하며 의문을 가졌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는지 말았는지는 어렴풋하지만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좁은 의자사이에서 구부정하게 무릎을 구부리고 서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애국가가 끝나면 대한 늬우스,
다음엔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캠페인영화를 십분정도 보여주었었다.
극장을 돌아 다니다 보면 그 영화는 거의 외울 정도가 된다.
요즘은 그런 영화대신에 예고편을 보여주지만 그 때는 예고편이 없어 
스크린 옆 쪽 벽에 '다음프로'라는 아크릴로 만든 박스형 광고판에 다음 영화 제목을 써 놓았었다.
꽤 오래된 얘기인가 보다.포스터도 아니고 제목만 써 놓았던 시기이니...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좋았던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덕에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서로 껴 안는 씬(그 때는 그것도 파격이었다.키스씬은 거의 잘려 나갔으니까)만 나오면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감거나  콩딱거리는 소리가 행여나 엄마에게 들리지 않을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떨구고 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들.
행여나 안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 내는 역활을 하면서 청소부가 들어왔었다.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1류 극장은 두 편의 영화를 하는 대신 쇼를 했었다.
지금은 영화관이 오로지 스크린만 설치되어 있지만 그 때는 무대가 있었다.
그 곳에서 사회자가 사회를 보고, 연주자들과 야한 언니들이 나와서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기도 했다.
신나게 노래부르고 춤추다가 필름이 다 돌아가 다시 상영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면
그 무대는 영화를 보여주는 스크린이 되었었다.
저 곳에 한 번 올라가 봤으면...수줍음 많은 그 시절이라 속으로 되뇌이고만 말았는데
결국 한번이 아니라 무대에서 사는 것이 업이 되었다.

이제는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 쓰러져 가도 좋으니 그런 극장에 가서 옛날의 그 정취를 느껴 보았으면 싶다.
그 때의 느낌을 살린 테마극장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엄마와 영화 한편 보고 싶은 그런 날이다.
엄마랑 같이 오징어도 먹고 칠성 사이다도 마시며 좋은 영화 한 번 보았으면.
I am Sam을 보면서 엄마가 그리워졌다.
모자란 아버지 Sam과 철없는 우리 엄마와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엄마의 모습이 가슴에 투영되는 걸까
오늘 같이 찬 바람 불던 날
빨간색 판타롱 바지에 뽀빠이가 그려진 빨간색 운동화를 신겨 주셨었다.
물론 우리 모녀는 영화관으로 갔을 것이다.
영화가 유일한 친구였던 엄마.
만약 그 시절 영화가 없었다면 엄마는 무슨 낙으로 사셨을까
불쌍한 엄마.
우리 철없는 엄마.

지금 당신을 닮아 철없는 딸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군요.

 

https://youtu.be/31jZ8EymfMA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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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0 02:09
    베스트

    나이를 초월한 우정, 한 남자의 성공, 모리꼬네의 인상적인 음악까지... 그렇게 긴장과 이완의 큰 굴곡잆이 잔잔하면서도 재미있고,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죠 간만에 다시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