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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4.07.26 14:37  (수정 07.2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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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5665639

지구의 나이가 45*6억년이란다. 과연 지구는 무슨 연유로 억겁의 시간을 버티며 우주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물며 지구에 발 디디고 살고 있는 인류는 유인원에서 진화하여 이제까지 어떤 업을 쌓고 있는 것일까?

 

그 알 수 없는 조물주의 의지가 무엇이길래? 만약에 조물주가 있다면  그저 관찰자일까? 내가 유일하게 믿는 게 있다면 바로 업이며, 그 카르마는 각기 사는 동안 쌓는 업에 따라 창조자이며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믿고 싶다. 부처도 인식적으로  잘 알 수 없다는 업(카르마)에 대해 파고 들었던 나는 미쳤던 게 분명하다.


https://youtu.be/JmcA9LIIXWw?si=aDA7I8fqB9pwDRte

 

소강절 선생의 말씀을 받들어, 부귀(富貴)는 선천적인 것이고 공덕(功德)은 후천적인 것이다. 이를 테면, 이건희를 보더라도 그렇다. 이건희는 자신의 재주가 있어서 많은 재산을 모은 게 아니다. 그저 선대 이병철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삼성의 물건을 사주는 소비자들이 많았기에 부를 축적했다. 이런 게 하늘에서 주어지는 선천적인 명이다. 허나 공덕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노력하여 이룰 수 있다. 이건희는 타고난 부귀는 있었을지언정 공덕은 없는 양반이었다. 그러니 장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칠십에 이르러 의식불명에 이르고 4년 전 황천길로 떠나갔다. 세상인심이 그렇다. 저마다 부귀하지 못 하고 빈천하면 부끄러워한다. 부귀하지 못 하더라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진정 부끄러운 일은 자신의 공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늘의 공덕은 저마다 업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튼 공덕은 타고난 부귀가 없다 해도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갈고 닦으면 최상의 업을 쌓을 수 있다. 자, 그럼 소강절 선생의 육성을 들어보자..."무릇 사람은 스스로 부자가 되지 못 한다. 반드시 하늘이 재물을 내려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부자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스스로 귀하게 되지 못 한다. 반드시 하늘이 그 귀함을 내려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귀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즉 부귀는 하늘에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않다. 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구하여도 얻지 못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공덕은 사람에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는 바 닦으면 얻을 수 있고 닦지 않으면 얻지 못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구하여서 부귀를 얻는 것은 자신이 구하여 얻어진 게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 한다. 구하여 얻으면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긍심이 생긴다. 구하여 얻지 못 하면 남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망이 생긴다. 만일 자기가 얻을 수 있음과 남이 줄 수 있음을 안다면 천하에 어찌 남을 헤아리지 못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난 위의 소강절의 본 뜻을 받자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싶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속삭이며, 세상만사 최고의 존재론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난 서스럼없이 니체의 '영원회귀'를 들먹일 것이다. 나의 유일한 믿음은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는 각자의 삶에서 최상의 존재론이며 최대의 긍정 형식이다. '차이와 선택'에 따라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생에너지(또 다른 생성)와 같은 것이기에. 차이와 선택이 있기 때문에 영원회귀가 있는 것이다. 차이와 선택이 없다면 영원회귀는 무의미하다.

 

업을 무진장 탐구했던 나는, 업을 공덕으로 보고 공덕(좋은 업)을 대단히 신뢰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에서 업(공덕)이란 게 없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행위나 존재가 무의미하고, 이 세상(인간사)에 업(공덕)이 발현되지 않는다면, 단 한 번의 생은 어처구니없거나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코미디다. 그리하여, 힘들게 살아갈수록 어떡해서든지 물질적으로 잘 살겠다는 소망(자기보존)보다 살아가는 동안 공덕을 잘 쌓으라고 충언하고 싶다(자기극복).

 

그런데 영원회귀를 주창한 니체는 불교식 자비(이타)를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니체에게서 삶은 자연의 생존(적자생존)처럼 이기(자기보존)를 위한 치열한 투쟁(생존)의 장으로 바라보기에 말이다. 이 지점에서 부처와 니체가 바라보는 업의 견해가 다를 뿐이다. 해법을 풀어보자면, 자신의 현생이 나쁘거나 빈천하여 요모양 요꼴이면 전생의 업(공덕)을 잘못 쌓아 그런 것이기에, 그것을 자각하고 현생에선 뭇삶에 대해 대자대비하거나 공덕을 쌓고 죽으면 다음 생에선 더욱 축복된 삶으로 윤회할지니, 본인의 구라를 믿을지어다.

 

어찌 보면, 불교의 연기(緣起)에 의한 윤회와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란성 쌍둥이다. 영원회귀는 니체의 철학에 있어서 주요한 모토이다. 니체는 영원회귀야말로 생의 최고 긍정 형식인 동시에 운명애(자의든 타의든, 생의 의지가 스스로 그러한 삶을 긍정하는 게 운명애라면)로 파악하고 있다. 근데 니체가 영원회귀를 주장했던 근본 이유는 기독교적 세계관(신이나 기독교적 도덕, 그밖의 일체의 피안적 요소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영원회귀를 설파하는데, 본인은 무종교이지만 조물주(관찰자)적 입장에서 윤회를 긍정하며, 개체의 생이 반복되는 가운데 언젠가 조물주가 보기에 부처나 예수처럼 마음에 들어할 만한 최상의 업(공덕)을 쌓는다면 더 이상 생을 반복하지 않고, 조물주(천명)의 섭리에 따라 영생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조물주 옆에서 딩가딩가하며 뒹굴기).

 

좌우당간, 불교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제대로 이해(통찰)하고 영원회귀를 인정하면 이것이야말로 생의 최고 긍정이다...곰곰이 생각해 보시라!...영원회귀는 인간의 기쁨(행복)과 슬픔(불행)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인데, 살아가는 동안 죽는 게 두렵고 육적 심적 고통이 괴로울 따름이지, 어차피 반복되는 생이라면 현생에서 자신의 처지가 불우(빈천)한들 뭐가 그리 대수인가. 현생의 환경이 불우할지라도 살아가는 동안 공덕을 잘 쌓는다면 다음 생에서 더욱 멋진 삶을 살게 되고, 거듭 업을 잘 쌓아 생을 반복하지 않고 윤회(영원회귀)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물론 득도(최고의 정신성)의 경지가 아니라면, 숨이 붙어 있는 한 개체의 생존본능(자기보존)에 의한 이기심과 욕망(욕심)으로 공덕이 잘 발현되지 않기에, 좋은 업을 쌓는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암튼 나의 우상인 랭보는 죽어가면서 영악하게 말했다지..."삶은 한 번 사는 것으로 족하다."

굥거니 탄핵은 12월에...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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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6 15:03
    베스트

    오랫만에 들어요. 

  • 2024.07.26 15:23
    베스트

    누가 3줄 요약좀 해줘

  • 2024.07.26 15:46
    베스트
    @세련된유럽형도시미남

  • 본느프와 작성자
    2024.07.26 16:00
    베스트
    @까망무깨비

    그냥 잘 사는 건 굥거니도 잘 합니데이^!^

  • 본느프와 작성자
    2024.07.26 15:58
    베스트
    @세련된유럽형도시미남

    업을 세련되게 잘 쌓으세예^!^

  • 2024.07.26 16:10
    베스트
    @본느프와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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