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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12:00  (수정 09.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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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과 인사동 - 조선일보(화첩기행41)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 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

 

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이로 배추이파리 같은 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 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 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

 

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 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 지상에 소풍 왔던 천사처럼 무구하게 살다간 시인의

 

혼은 가고 남은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숫자 계산에 어둡고 어린애 같은 셈법으로 살다간 시인은 사실 '서울상대' 출신이었다.

 

우리 모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했다.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세속과 악의 혐의가 짙을수록 그 어린아이 같은 시인을 그리워했다. 지상에서 가난했고 고초 당했던 그 시인은

 

그러나 천국에 가면 땅은 선한 것이었다고, 지상은 아름다왔노라고 전할 것이라고 썼다. 악은 그의 머릿속에도 없었고 가슴에도 없었다. 악에 관한한 그는 지진아인 셈이었다.

 

사물과 사람을 투명하게 관조하여 그려내었던 천상병은 그러나 1967년 7월 친구 한 사람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엉뚱하게도 기관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받게 된다. 그 후

 

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된다. 뜻밖의 고초와 충격으로 그의 정신은 황폐해졌고 어느날 거리에 쓰러져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시립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어디에선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유독 어린아이를 좋아했던 시인은 훗날 아내에

 

게 '전기고문을 두 번만 받았어도 아기를 볼 수 있었는데…'하며 아쉬운 마음을 술회하곤 했다 한다.

 

동백림사건 이후 그의 시세계는 죽음 저편을 바라보는 초월의식과 함께 종교적 원융무애의 어린아이 같은 세계로 나아간다. 엄청난 고초를 겪었지만 절망과 증오와 비탄 아

 

닌 맑고 투명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열어보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성자였다.

 

병구완에 헌신적이었던 아내 목순옥을 그는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천사라고 했다. 그는 생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활발한 걸음걸이가 아니었지만 인사동에 나오기를 즐겨했다.

 

아니, 인사동 골목의 아내가 하는 작은 찻집 <귀천>에 나오기를 좋아했다. 귀천에 나오면 무엇보다 하루종일 아내를 볼 수 있어 좋고, 문인·화가·연극인 같은 다정한 사람들

 

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빨간 옷 입고 오는 여자나 안경 낀 남자는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 역

 

시 아이 같은 일면이다. 빨간 옷 입거나 안경 낀 손님이 오면 '문디가시나 문디가시나'하며 아내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용돈 2천 원이면 나는 행복하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맥주 한잔과 아이스크림 하나면 딱 좋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좋아했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딱한 노릇이다. 굶지 않기만 하면 되는데… 내게 만일 1억 원이 생긴다면 나는 이 돈을 몽땅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겠다. 장학금으로….'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처럼 가볍게 살다가 시인은 이제 인사동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고 작별을 고하며.

 

천상병이 떠나버린 인사동은 쓸쓸하다. 야트막한 집들과 필방과 도자기와 그림과 그리고 한국차와 시의 동네 인사동. 모든 것이 번쩍거리기만 하는 시대에 무채색으로 가라

 

앉아 있어 정겹던 그 인사동. 이제는 그 동네도 반들반들 닳고단 상업의 거리가 되어간다. 인사동이 때묻어 갈수록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그 때 묻음을 씻어내고 정화시

 

켜 그래도 인사동의 인사동다운 맛을 지켜내었건만, 그 인사동 지킴이 천상병은 새 되어 천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촉수 낮은 '수희재' 전등 밑에서 세상과 인생을 들려주던

 

'민병산 선생' 떠나고, 인사동을 홀로 지키던 '귀천'의 시인 천상병마저 천국으로 돌아가버려 인사동은 허전하기 그지없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고 눈발이라도 흩날릴 때 '귀천'을 찾아가는 마음들이 비단 그 모과차의 따뜻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저기 저만큼 어두운 한쪽에 언제나처럼 앉아 있

 

던 시인의 순수가 더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어딘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변두리, 가장 멀리 떨어진 별 너머 아득한 저편... 영원에는 진실하고 숭고한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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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는 탄창 1000개를 맞고갔어도 과하지 않음

  • 동이족 작성자
    2024.09.06 12:03
    베스트
    @최고다이재명(서둘Official)

    너무 많은 이들이 스러져갔지요.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처럼 뒷마당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갈겼어야....

  • 2024.09.06 12:17
    베스트

    귀천. 다른 일행들과 섞여앉아도 어색하지 않았던 낮은 탁자, 무언가 통하는 정겨움을 품은  공기, 사모님이 진하게 끓여주던 대추차가 생각납니다. 벌써 이십 몇 년 전 일이네요. 

  • 동이족 작성자
    2024.09.06 12:20
    베스트
    @구름사다리

    다녀오셨었군요.

  • 2024.09.15 20:48
    베스트
    @동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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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듣고나니 불현듯 가보고 싶어, 며칠 전 다녀왔습니다. 찻집 풍경이 기억과는 조금 다르지만, 진한 대추차는 여전하네요. 

  • 동이족 작성자
    2024.09.1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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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사다리

    액자에 시를 읽다보니 시인님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생각나네요.. 제가 다 감사합니다..

    평온하고 즐거운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2024.09.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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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천....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저런 마음으로 죽음을 맞아야겠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