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2024.04.19 03:57
1001
72
https://itssa.co.kr/13290315

첫 회사를 2년 다니고 나왔다가 다시 2년 다니고 퇴사했었다.

벌써 그곳을 나온지 수년이 지났고 현재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그곳에서 지냈던 기억 그리고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가령 퇴근 후에도 종종 불안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살핀다. 거의 매일 야근했던 기억 탓에 지금은 무조건 칼퇴근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음에도 습관처럼 불안이 남는다. 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한다. 누군가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 말 뒤에 혹여 나에 대한 적대감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덕분에 나의 언행이 조심스러워지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눅들고 당당하게 뭘 요구하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

 

사실 그 직장이 소위 '좆소'의 상위 클라스는 아니지만 나름 별난 구석이 있었다.

 

우선 근무시간이 재밌다. 월~수 아침 08:20 출근 / 밤 10시 퇴근이다. 사실 밤 10시가 되도 제때 퇴근하지 못했다. 눈치 보고 밍기적대거나 잔업을 처리하다 보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더 늦게 퇴근한다. 목~토 아침 08:20 출근 / 저녁 7시 퇴근이다. 그래서 회사에는 식당 이모님을 두고 점심과 저녁식사를 제공한다. 당시는 주 72시간까지 근무 가능하던 시기라 법적 문제는 없었다. 심지어 포괄임금제 고용 방식이라 더 늦게까지 일해도 야근수당도 없었다. 택시비는 제공해줬지만 직원 대부분이 회사 근처 원룸에 살아 유명무실했었다.

 

또 하나 충격적인 모습은 직원으로 일하던 사장의 큰딸이었다. 그 딸은 거의 매일 날을 샜다. 내가 아침에 출근할 때면 사장 딸은 퀭한 눈으로 인사를 해온다. 그러다 점심 전에 퇴근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회사 업종은 출판기획사였고 그 딸은 편집디자이너였다. 당시 디자인 팀은 인력이 충분치 않아 수주한 사업의 책자 디자인은 물론 제안서에 들어갈 디자인 시안까지 도맡았다. 그래서 늘 밤을 새도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기자/작가로 입사했는데 원고를 쓰는 일보다 제안 기획 일을 더 많이 해야했다. 

 

또 하나 특징이 있다면 사장의 '교육시간'이다. 입사 첫해에는 하루에 꼭 한번씩은 사장의 '교육'이 있었다. 전 직원을 한 데 모아놓고 사장이 약 50분 가량 떠든다.(용산의 누구같네) 나쁜 내용은 아닌데 듣기 싫은 말이었다. "경제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성장세다. 그런데 너희들 일하는 게 맘에 안든다. 더 열심히 일해라" 대개 이런 내용이다. 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소개시키고는 꼭 노래를 시킨다. 끝까지 거부하면 그냥 넘어가지만 첫출근에 그런 배짱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한달에 한번씩 생일자 모아 서 축하해주고 입찰 성공하면 징까지 쳐가며 축하해주고. 군대 같기도 조직폭력단 같기도 한 그런 곳이었다.

 

야근과 인력난, 박봉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체계가 없었다. 

 

나는 글쟁이로 입사했었다. 그런데 한달간 전단지 디자인을 해야 했다. 놀랍게도 디자인을 공장식으로 분업한 덕에, 디자인을 배워본 적도 없는 나도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달간 일을 시킨 후에야 기획팀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일종의 테스트였을까. 기획팀 발령 며칠 전인가, 내게 녹음파일 하나 주고는 원고를 쓰라는 것이었다. 무슨 기업 인터뷰였다. 나는 참고하라고 준 잡지를 한 번 쓱 보고는 대충 흐름을 잡아 글을 썼다. 그게 썩 볼만했는지 기획팀으로 전출됐다. 비로소 내 자리를 찾아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상천외한 문제는 기획팀 출근 첫날부터 나를 애먹였다. 

 

공공기관에서는 입찰사업을 시작하기 전 제안요청서를 나라장터(온라인 입찰 플랫폼)에 올린다. 입찰에 응할 기업들은 그 요청서를 보고 제안서를 제출한다. 우리는 출판업종이기 때문에 기관에서 발간하는 서적 제작 사업을 수주해야 했다. 그런데 기획팀 출근 첫날 내게 요청서 하나 주고는 제안서를 써보라는 것이었다. 회사 서버 위치를 알려주고는 이전에 만든 제안서들 참고해서 만드라고. 내가 머리가 좋은 놈이었다면 차분히 살펴보고 가닥을 잡았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그야말로 '멘붕'이 온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만약 그날 내가 제안서를 썼다면 그대로 입찰했을 것이다. 그 회사는 무조건 제안서 넣고 단독입찰과 유찰이 걸리길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제안서는 적당히 포맷만 갖추면 됐다. 다만 그 사실을 누군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내가 겪고난 후에 깨달은 것이다. 만약 회사의 전략이 그런 것이었다면 그렇다고 설명이라도 해주든가. 제안 작업에 차근차근 참여를 시키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업무 인수인계 방식이 전혀 없었다. 

 

세세하니 늘어 놓다보면 책 한 권 분량은 적을 수 있다. 꼴에 작가라고 우당퉁탕 취재 가서 난생 처음 기자행세 했던 일, 범 아가리 같은 기관에 불려가 탈탈 털릴 뻔하던 걸 세치혀로 겨우 막아냈던 일 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사장 쁘락지 노릇했던 일 등.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 깊은 추억(?)이었다. 불과 4년 다닌 직장이었지만 여전히 그 좌절과 절망의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

 

내가 제목에 적은 '좋은 회사'라는 곳은 대기업이나 흔히 잘나간다고 알려진 직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도 일종의 사회다. 내가 그곳에서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어야 하며, 나의 밥벌이를 책임져 줄 수 있어야 하고 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나를 성장 시켜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직장에서 매일 좌절하고 고통받고 나 스스로 가치가 깎이는 곳이라면 그곳은 그냥 지옥이다. 그런데 그 지옥이 무서운 이유는 내가 그곳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끓는 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이 익는 줄 모른다. 나도 그 기이한 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워낙 늦은 나이에 들어간 첫 직장이라 나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잡았다. 더욱이 그 회사는 그런 인력들을 모아다가 "여기나 되니까 너희들 써준다. 우리는 부족하니까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력을 갈아 넣은 덕에 그 회사는 제법 성장을 했었다.

 

그래도 내가 첫 퇴사를 한 이후에는 괜찮은 인력을 충원하고 근무시간도 줄여(사실 주52시간제 도입 덕이지만) 나름 잘 나갔었다. 하지만 첫 입사 후 겪었던 일들은 후유증처럼 남았다. 아마 그곳에서 나는 내 영혼의 일부가 붕괴됐던 것 같다. 여전히 내 자신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쉽게 주눅들곤 한다. 무엇보다도 그 회사를 나온 후 들어간 회사들의 멀쩡한 모습에 감탄했던 내 자신이 스스로 안타까울 지경이다. "고용계약서를 바로 써준다고? 월급이 안 밀린다고? 업무 인수인계가 이렇게 잘 된다고?" 하며. (그 첫 회사는 연말정산 개념이 없었다. 내가 연말정산 안하냐고 물은 후에야 연말정산을 시작했었다)

 

물론 좋은 회사가 많은 건 아닐 것이다. 또 10가지 중 9가지가 마음에 들어도 1~2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곳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도 결정적인 아쉬움이 하나 있지만, 그것을 상쇄할 좋은 점이 많아 마음 편하게 다니고 있다. 다만 그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범주에 들지 않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계속 다니면서도 내 자신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붕괴되어가는 나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날 것인지를.

 

얼마 전 그 회사가 폐업 수준의 위기를 겪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던 중, 문득 그 시절이 떠올라 이렇게 몇자 적어 보았다.

 

 

댓글 11

댓글쓰기
  • 2024.04.19 04:24
    베스트

    이시간에 깨서 잇싸들어왓는데, 재밋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2024.04.19 04:50
    베스트

    제목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들어와서 읽었는데 좋은글 이네요^^

  • 토닥토닥~

    그땐 그랬지요~

  • 2024.04.19 06:17
    베스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24.04.19 06:44
    베스트

    좋은글 👍👍👍👍👍👍👍

  • 2024.04.19 06:45
    베스트

    한편의 소설을 읽은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2024.04.19 07:27
    베스트

    아침부터 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길 🙏

  • 2024.04.19 08:12
    베스트

    무엇이든 첫걸음 첫경험 첫사랑 첫음식 처음이 중요한거 같습니다.

  • 2024.04.19 08:14
    베스트

    글이 긴데도 정말 편허게 술술 읽히네여

    역시 작가님이시군여 글솜씨가...

     

  • 2024.04.19 08:45
    베스트

    역시 작가님이란 댓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꽤 긴 글인데도 모두 읽게되네요

    특히 '매일 좌절하고 고통받고 나 스스로 가치가 깎이는' 표현이 현재 제 직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1~2개빼고는 너무나 멀쩡한 회사를 다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단순 밥벌이 이상을 기대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지옥을 탈출하신 것 . 정말 잘 하셨네요

  • 2024.04.19 11:54
    베스트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네요.

    덕분에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