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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30 04:55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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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715540

어슴푸레한 저녁이 다 돼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얀 눈송이가 하늘 가득히 흩날렸던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놀이터와 동네를 가로지르던 실개천을 전전했다. 끝내는 불길함을 가득 안고 집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에게 심한 꾸중을 듣는 와중에 그 현실을 접하고야 말았다.

 

엄마가 챙겨주는 저녁밥을 마지못해 먹는 도중에 옆집 아주머니가 위로차 오셨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시는 얘기를 듣자니 물밀듯이 파고드는 슬픔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술 밥을 떴지만, 도저히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안 넘어 갔다. 텁텁한 모래알을 입안 한 가득 물고 있는 느낌이었고, 이내 목구멍은 콱콱 막혀왔다.

 

그리고 두 눈망울엔 눈물이 한아름 고였고, 금세 눈물방울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눈물을 떨구는 것이 못내 부끄러운 나머지, 수저를 밥상에 조용히 내려놓고 내 쪽방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https://youtu.be/Nac2jcATrjg


제 나이 또래에 순수한 외동은 드뭅니다. 정말 말하기 싫은 아픈 기억이 있기에 말입니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는데(아장아장 걷기는 했으나, 반 소아마비에 턱밑 목에서는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만 11년을 살다간 이승에서의 아픈 삶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에 하늘 나라로 속절없이 올라갔답니다. 

 

동생에게는 고통 같은 나날 속에서 짧은 11년을 살다가 이승에서의 삶이었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은, 그 당시 그 병명조차 알 수 없는 병이었기에,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로, 설사를 동반하며 빼짝 말라갔습니다. 가족들은 그걸 애처롭게 지켜봐야 하는 심적 고통의 11년이었습니다. 남동생이 그렇게 태어난 것에 대해, 전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동생이 죽기 전 날 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돼서도 동생은 그날따라, '엄마!, 엄마!'하는 큰 외마디의 목소리가 제가 자고 있는 건넛방까지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때, 전 동생이 죽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그 날 밤을 뒤척이다 겨우 새벽에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집을 슬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그 끔찍한 현실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차마 그런 현실이 정말 미웠던지, 아무말 없이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안 계시면 동생 돌보는 일은 저의 몫이었기에 놀이터에서 동생을 데리고 가서 자주 놀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의 놀림에 싸우기도 하면서, 그럴 때면 남동생을 남들이 볼 수 없는 골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무릎을 꿇고서 동생의 손을 맞잡고서 하나님과 부처님을 읊조리며, 제발 동생을 낫게 해 달라고 얼마나 빌었던지요. 그런 바람도 다 무용지물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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