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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작문/소설/대본] 사자성어
2023.05.2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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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4105106

1.

 

"부장님, 지금 퍼뜩 생각나는 사자성어 두 개만 말해보세요."

 

"왜?"

 

"아, 일단 두 개만 말해보라니까요."

 

"글쎄...워낙 가방끈이 짧은 터라 갑자기 물어오니까 생각이...음..."

 

"......."

 

아니, 이 녀석이 퍼뜩 생각나는게 없다고해도 두 눈에 기합을 가득 넣어 나를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곧 봄이 오니까...입춘대길(立春大吉)하고...음..그래, 겨울이 가니까 송구영신(送舊迎新)?"

 

"그게 사자성어예요?"

 

"아닌가? 아님 말고."

 

"사람들에게 갑자기 사자성어 두 개를 이야기하라면 대부분 첫번째는 자신의 인생관이 담긴 것을, 두번째는 애정관이 담긴 것을 이야기한대요."

 

"그래? 그럼 입춘대길하고 송구영신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데?"

 

"음...가끔 이게 틀리는 경우도 있겠죠. 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피식 웃으며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치졸한 우스갯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구박을 줬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상대방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를 나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2.

 

생산부 미스터 K는 둘째 아들놈이 갓난 아기였을 때 어째선지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본의 아니게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힘겹게 생활하고 있다.

 

"미스터 K."

 

"응?"

 

"지금 퍼뜩 생각나는 사자성어 두 개만 말해봐."

 

"아, 쓸데없는 것 좀 물어보지 말라니까."

 

"아, 그래도 서울역 앞 노숙자에게 식사한끼 대접하는 셈치고 한번만 말해봐봐."

 

"지랄한다. 음..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니까..음...우선..풍전등화(風前燈火)하고...고진감래(苦盡甘來)?"

 

장난삼아 물어본 것이었지만 잠시 움찔했다.

 

"그런데 그런건 왜 물어보는데?"

 

"아...그러니까..."

 

 

3.

 

미스터 P는 입사한지 셋째날, 두 시간이나 늦게 출근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시간, 부두목이 나에게 아주 초현실적인 일을 겪은 다음 공황상태에 빠진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왔다.

 

"이부장."

 

"예?"

 

"저기 새로 입사한 P라는 저 녀석, 오늘 지각했잖아."

 

"아, 예."

 

"아니, 엊그제 입사한 놈이 벌써부터 지각을 두어 시간이나 한다면, 안봐도 뻔한거 아니겠어? 그래서 불러서 왜 지각했느냐고 물어봤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감지되었는데, 부두목의 표정으로 보아 아무래도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왜 지각했는지 모르겠다는거야."

 

"......"

 

이것 참, 만만치 않은 놈이 들어왔구나, 하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생겼다.

 

"너무 황당해서 돌려보냈는데, 이부장이라면 그럴때 뭐라고 하겠어?"

 

"......"

 

나같았으면 일단 꽁꽁 묶어 곤장을 너댓대 패고나서 이실직고 할때까지 주리를 틀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나서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미스터 P의 형이상학적인 기행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나에게서는 싸이코라는 별명을, 미스터 K에게서는 암세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암세포? 그게 뭐야?"

 

"저놈은 인간계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놈이야. 주변의 사람들을 피곤하게만 하는 놈이라고."

 

그래도 암세포라는 별명은 너무 잔인하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당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의외로 미스터 P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세상은 넓고도 광활해서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눈앞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점심시간, 담배 한개비를 빌리러 뛰어다니던 미스터 싸이코가 미스터 K에게 걸렸다.

 

"야, 암세포! 일로 와봐."

 

"예?"

 

"너, 지금 퍼뜩 생각나는 사자성어 두 개만 말해봐."

 

"에이, 전 그런 거 모르는데요."

 

"까불지 말고 어서 말해보라니까."

 

미스터 K가 미스터 싸이코에게 담배를 한개비 내밀었다.

 

"에....그렇게 물어보니까...일단... 일타쌍피(一打雙皮)하고...."

 

"......"

 

"음....그리고...그리고..음...기왕이면 다홍치마요!"

 

"......"

 

순간 울컥하는 미스터 K의 이마빡에 뭐, 이런 놈이 다있노? 하는 내용의 글자가 양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지는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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