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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작문/소설/대본] 유년시절의 되새김.
2022.09.0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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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228830

내 유년시절의 되새김은 육신의 고통과 정신적 공포로 저당잡힌 변주곡이었다. 초등학교 유년시절(1980년대 초중반)을 함께 했던 고장은 남한의 최전방이며 땅굴의 고장으로 유명한 강원도 철원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북한표 삐라줍기와 반공웅변이 자랑스러움을 더했던 고장이었다. 교정 너머로 보이던 산꼭대기 대머리 민둥산엔 어느 포병부대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작렬했고, 연실 대포 소리가 지랄맞게 진동했다. 특히 초등학교 그 시절에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은 2, 3학년 무렵에 교정의 건물 곳곳에 나부꼈던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포스터와 함께 그것을 축전하는 웅변 대회였다.

 

일곱 살 때까지 원주에서 살다가 철원으로 이사 가서 살 때는 거의 악몽과 다를 바 아니었다. 원주에선 동네 아이들과 철교 위에서 스릴을 만끽하거나 시내 안 시장의 풍물들을 구경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철원이란 소읍은 사방으로 막혀버린 드넓은 평야와 민통선으로 가로막혀 더 이상 오갈 데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랬던지라, 학교 운동장이 유일한 놀이터였으며 아카시아 나무들이 교정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고, 아카시아 나무 뒷편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연못 속 풍경이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무대였다. 이따금씩 아카시아 나무 주변으로 구렁이가 출몰하여, 또래 아이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기에 바빴다.

 

학교 담벼락 너머로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동네 형들의 손에 이끌려 과수원의 딸기를 서리하러, 야밤을 틈타 철조망 울타리를 넘나드는 고개를 벌이다가 과수원 주인에게 붙잡혀 혼쭐이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맘 쯤에 과수원을 화사하게 수놓았던 하얀 배꽃들이 달빛을 배경으로 꽃빛을 뽐내고 있는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넋이 빠지곤 했다. 그러다 봄이 가고 여름의 문턱으로 들어설 무렵, 그 화사함을 뒤로 하고 배꽃잎이 낙화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

 

아카시아 꽃이 한창 만개할 무렵의 5월 중순, 저는 아카시아꽃 향기 가득 품고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아이들과 아카시아꽃을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으면서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에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이었을 거에요. 학교 교정을 둘러쌌던 아카시아 나무 뿌리 근처에서 어른 몸길이에 가깝고 몸통이 굵은 구렁이를 발견했습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줄지어 서 있던 교정의 울타리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구렁이를 보자마자 이구동성으로 "뱀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제 또래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놀란 나머지 구렁이가 재빠르게 높은 아카시아 나무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좀 시간이 지나는가 싶더니만, 마른 나뭇가지에 똘똘 말린 구렁이가 무게를 못 견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마자 제 또래 아이들은 식겁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들은 신기함에 들뜬 나머지, 그 사실(구렁이가 있다고 야단법석을 떨면서)을 학교 아저씨에게 알렸습니다. 장정 몇 명이 달려들어 긴 나무 막대기로 구렁이의 목을 제압하여 잡았는데, 큰 양동이에 구렁이를 담아 보니 한 가득 차지했습니다. 그 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정의 아카시아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지고 말았습니다. 

 

++

 

세월의 하인(下人) 

 

그 당시엔 어렸기에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었고
가슴 속엔 치유할 길 없는 수줍음과 주눅이 자라났다.
 
구렁이와 아카시아 나무들로 둘러싸인 교정에는
학살자의 포스터가 나부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켜켜이 쌓여 굳어버린 세월의 더께를 무너뜨리고 
뒤틀린 시간을 다시 곧추세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잔인한 시간들을 반추해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무심히 흘러버린 세월이며 반성없는 역사였다.
 
오금은 쓰라리고 진실은 목메어 우는데
애상의 주체들은, 모두, 세월의 하인(下人)이었다.

 

https://youtu.be/nqRt_T9W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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