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2022.11.15 05:31
211
3
https://itssa.co.kr/1431634

재수 시절에 문학에 눈을 뜨며 점점 더 내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인식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랭보에게 열광했고, 사회로부터 도피하듯 군에 입대하여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제대로 느끼며 제대한 후에, 랭보(현대식 영웅은 행위의 인간이다)와 같은 예술가적 고행의 길을 걸어가리라고 굳센 다짐을 했다.

 

전역 이후 뚜렷한 직장 없이 이리저리 싸돌아다닌 대가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시련뿐이었기에, 끝내는 정신적 안정을 찾을 만한 안식처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소시민적 삶을 경멸하면서도 동경했던 내 청춘의 모순과 직면하게 되니, 괜스레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의 소설)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故 김현은 [행복한 책읽기]에서 오장환의 병적 낭만주의(재치와 겉멋뿐인)를 읽어냈다. 그리고 사정없이 오장환을 비아냥거렸다. 난 그 글을 읽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현이라면 당연히 김현이라면, 오장환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 자신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난 오장환 시인을 좋아했다. 내가 오장환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와의 친화력(괴테의 책 제목이네)이었다. 군전역 이후 하릴없이 방황하고 있었을 때, 엄니가 우울증으로 입원하고 있던 신경정신과 병동에서 우연찮게 오장환(병원 휴게실에 꽂혀 있던 문학잡지)을 접한 이후, 오장환 스스로도 말한 "시란 그저 아름다운 것, 시란 그저 슬픈 것, 시란 그저 꿈속에 있는 것, 그때의 나는 이렇게 알았다. 시를 따로 떼어 고정한 세계에 두려한 것은 나의 생활이 없기 때문이었다. 거의 인간 최하층의 생활 소비를 하면서도 내가 생활이 없었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책임이란 것을 느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곤하기 때문이었다"는 그의 생각과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입에 풀치하기 위한 생계마저 포기한 건 아니었다. 안정적인 생활 내지 직장이 없었을 뿐,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궁여지책으로 이런저런 육체노동 - 신문돌리기, 우유배달, 일용직 잡부, 전기작업, 숯굽는 일, 도로 위에 차선 그리는 일, 목장일, 농삿일, 고시원 총무, 갖종 운전배달, 단청일, 무인도 지킴이 등등 - 으로 전전하며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 바빴다. 그 당시 정말 경험해 보고 싶었던 일은 원양어선 내지 배타는 거였는데, 신문배달 할 때나 고시원 생활할 때 유경험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차마 배는 타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나마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리고 그(오장환)의 특성이 바로 나의 특성이었다...'게으름, 늦잠, 책광, 프랑스 상징주의 애호, 서정주 좋아하기'...지금도 솔직히 말하면 서정주의 그 악마성을 좋아한다. 그의 부끄러울 줄 모르는 솔직한 악마성이 어찌됐든 간에 말이다. 물론 오장환의 초창기 시절의 詩편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악마가 내미는 손길 같았다.

 

https://youtu.be/Z95t57HyYTE

 

젊었을 때, 내겐 '유용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언제나 더없이 흉측한 것으로 보였(보들레르 - 벌거벗은 내 마음 - 중에서)'기에, 군 전역(1995년) 이후 2002년까지 늘 그렇게 정처없이 쏘다녔다. 결국 2002년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말았다. 내게 젊음이란 그저 쓰라린 고통이었다.

댓글 7

댓글쓰기
  • 2022.11.15 07:10
    베스트

    2002년 그 댓가가 넘 궁금하네요. 

  • 이지튀르 작성자
    2022.11.15 07:21
    베스트
    @버블티

    궁금하면 오백원이요^!^

    그 대가란 저렇게 살았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거 같다는 두려움이었죠.

    소중한 시기에 젊음이라는 특권을 막무가내로 허비한 시간들이 쓰라린 고통이었다는 걸 느낀 대가였죠.ㅎ

  • 2022.11.15 08:41
    베스트
    @이지튀르 그 고통의 결과물이 지금 써주시는 글들 아닐까요? ㅎ
    또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 이지튀르 작성자
    2022.11.15 09:30
    베스트
    @버블티

    그 당시 절 잘 따르던 대학생 여동생(김정란 시인의 라니카페에서 알게 된 인연)이
    절 보면 뭐가 그리도 답답했는지 당신처럼 그렇게 살거였으면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고 독설을 날렸죠.
    아직까지 마지못해 살고 있는 인생인데요, 뭘 기대하시렵니까.ㅠ

  • 2022.11.15 09:42
    베스트
    @이지튀르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나가야 하는 인생.
    어느 누가 그러하지 아니 할까요?

    저는 기대하렵니다 ㅎㅎㅎ
  • 2022.11.15 08:29
    베스트

    한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네요. 2002년이후가 궁금해지는.

    님의 글 잘 읽고있습니다

  • 이지튀르 작성자
    2022.11.15 08:44
    베스트
    @TheBlue 그러시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