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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0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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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41510

난 서울에서 강남은 잘 모르지만 강북은 속속들이 잘 아는 편이었다...지금은 상경한 지도 오래되어 서울이 낯설다...강남은 잠시 걸어서나 지하철을 타고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근데 강북은 웬만한 구는 다 누볐다고 해도 무방하다. 서울 생활에서, 처음 발을 디뎠던 곳은 중 3때(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도)였다. 성동구 구의동(전엔 성동구였는데, 지금은 광진구?)의 어린이 대공원 후문에서 성북구 정릉 3동까지 522번 버스틀 타고 통학할 때는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통학 시간이 1시간 가까이 되었다. 그야말로 지옥 버스를 타고서 내리면 멀미가 날 정도였다. 그걸 힘들어 했던 나는 2학기부터 작은 이모네 정릉1동에서 통학하게 되었다.

 

정릉과 길음, 그리고 미아리는 나의 활동반경의 주무대였다. 그 당시 미아삼거리의 랜드마크는 대지극장이었다. 미아삼거리 지나 길음시장, 그리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넘으면 돈암동이었다. 미아리 고개보다 그 옆동네 아리랑 고개가 더 가파른 편이다. 정릉을 주무대로 한국 영화 중에 '건축학개론'이 있다. 돈암동은 중고딩의 아지트지만, 난 중고딩 때는 돈암동으로 외출한 적이 별로 없다. 싸돌아다녔던 주무대는 길음시장과 인수동 시장의 뒷골목이었다. 지금 미아리, 길음시장과 인수동 시장은 뉴타운이 들어섰기에 아파트 대단지로 변모했다. 예전보다 훨씬 단장된 감은 없지 않지만, 길음시장과 정릉 1동 앞읋 고가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답답하다. 상습 정체구간이 바로 길음시장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구간이었다.

 

그 당시, 길음시장 근처인가 미아리 삼거리에 동시상영 극장이 있었는데(극장의 이름이 미아리 극장?), 고딩 1학년 겨울방학 때 단짝 친구랑 '투 문 정션(1988)을 보았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성인 영화였지만, 그 감각적 영상(애로 씬)에 매료당했다. 그러니깐 나인 하프 위크(1986) 같은 영화였다. 동시상영 영화는 한국영화였는데 제목이 가물가물하다. 뭐였더라?? 매춘2였지 싶다.

 

+

 

조선일보, 그리고 잡다한 이야기...조선일보와 첫 역사적인 대면을 가진 것은 아마도 내가 철원(은 반공웅변이 자랑스럼을 더하던 고장) 국민학교 5,6학 년이었을 거다. 그때, 나의 꼰대(는 극우주의자 가까웠다)는 승진(교감) 시험 때문에 논술 시험에 대비해 조선일보를 구독하게 되셨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문밖에 나가보면 조선일보가 항상 날 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조선일보를 읽게 된 것은 그 신문기사의 내용이 재미 있었거나 혹은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었다기 보다는 한자를 맞히는 재미로 읽었다. 솔직히, 초등학교 수준으로 신문의 전내용을 파악하기란 힘든 법이다. 물론 시사적인 것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았을지언정 어떤 사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 밖에 내가 시사적인 면이나 사회*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된 배경은 kbs의 9시 뉴스였다. 난 할아버지랑 같이 방을 썼기에 티브이는 부모님의 터치를 안 받고 마음 놓고 보았다. 그러나, 9시 뉴스 만큼은 채널권이 전적으로 할아버지께서 쥐고 계셨다. 그래서, 재미도 없는 9시 뉴스는 꼭 시청해야 했다. 물론 그 밖에 다른 채널권은 내 몫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에 민감한 안테나를 가지게 된 게 알고보면 9시 뉴스를 초등학교 때부터 시청해온 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봤자, 그 당시 9시 뉴스는 그야말로 '전땡 뉴스'였다. 살벌한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으니 오죽 했겠냔 말이다. 물론 그 때는 왜, 9시 뉴스 시작 시그널이 나오자마자 '전두환 각하'로 시작하는 뉴스가 첫 헤드라인 소식으로 나오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았던 것이다. 아니다, 아예 그런 의식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초등학생이 뭘 알겠는가!

 

여튼 그 때 생각나는 뉴스거리 중에 생각나는 것은 전두환의 근황 소식(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전두환이가 어떤 포장마차에 들려서 술먹는 장면이 헤드라인 톱뉴스로 나온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과 이란*이라크 전쟁, 포클랜드 섬을 두고서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을 전하는 뉴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앵커는 최동호 씨, 아니면 박성범 씨였다. 

 

그때 뉴스를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이란*이라크는 저렇게 전쟁을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국가 이름도 비슷한데 이유가 도대체 무얼까 하고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유치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참말로 궁금했다. 그 정치적인 배경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 맨날 그 뉴스를 접할 때마다 서로 로켓포만 열심히 쏘아대는 장면만 실감나게 구경했다.

 

그리고 제일 생각나는 외국의 정치인으로는 역시 영국의 수상, 철의 여인으로 불리웠던 대처랑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이었다. 이 두명의 정치인을 질리도록 뉴스에서 많이 보았다. 근데, 그 당시 유독 우리 나라 정치인은 한 명도 생각나질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솔직히, 그 당시 난 우리 나라의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김영삼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김대중도 누구인 줄 몰랐다. 그렇게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을 몰랐던 것이다. 제법 유명한 정치인이라면 뉴스에도 자주 등장했을 텐데 말이다. 

 

본래의 얘기로 돌아와서 조선일보는 잠시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는 한참 민주화의 물결이 온 서울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촌(강원도 철원)에서 처음 대도시로 전학을 오게 된 나(촌놈)는 도대체 그 놈의 최루탄 가스 때문에 엄청 고생을 하게 되었다. 난 그것을 처음 어린이 대공원 후문(구의동)에서 맡고서 그것이 최루탄 가스인 줄은 미처 몰랐다. 왜냐면, 선천적으로 편도선이 나쁜지라 또 목감기가 왔구나 했다. 근데 한여름인 데도 목감기라니! 속으로 난 생각했다. '젠장, 서울이라는 곳은 공기가 얼마나 나쁘면 나의 연약한 목이 다 아플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막내이모에 의해 알게됨)이지만 그것이 '최루탄 가스'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왜냐면, 난 그때까지도 그것의 실체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도 국민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매일 수업 중에 최루탄 가스를 맡으며 수업을 받는냐고 곤혹을 치뤘다. 그래서, 우리 또래들은 "대학생 개쉐끼들 또 데모냐..."하고 욕박가지를 퍼부었다. 물론 데모로 인해 수업을 못 받은 적도 있어서 그럭저럭 데모로 인해 덕택은 본 셈이었다. 

 

그러다 19887년에 직선에 의한 대선이 치뤄졌고, 난 외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노태우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친구들 한테 설레방쳤다. 노태우가 안 되면 큰 혼란을 겪는다고 친구들 한테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그런데, 내 짝쿵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나...', 무슨 소리냐고 김대중이 대통령되면 우리 나라 망한다고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친구에게 말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내! 시골(철원)에서 올라온 촌놈이 그 전에 서울에서 벌어진 일들을 어찌 알 것이며,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어쩜 당연했으리라. 하여 그렇게 해서 대선은 시작되었고 노태우가 보통 사람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도 그 이듬 해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3년 동안을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학교와 집을 오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고3 때 부터 다시 조선일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도 내 스스로가 심사숙고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꼰대가 대뜸 이젠 너도 고등학교 3학년이니 신문을 봐야지 않겠니, 하고 물어오셨다. 난 아무 생각없이 아버지 의견에 동조하였고, 아버지는 내게 물어오셨다. "그래 어떤 신문을 보겠니?", 하고 재차 물으셨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래도 조선일보를 봐야 될 것 같다고...." 대답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일보를 봐야 된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굳이 많은 신문 중에 조선일보를 봐야 된다고 대답했나,였다. 아마도 유년시절에 처음 접했던 신문이 조선일보라서 그것이 무의식 중에 남아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일 거다. 꼰대도 군소리 없이 나의 안목을 탁월한 선택인양 받아들이며 대견스러워했다. 신문을 볼 때, '기자수첩'이나 '칼럼(논설)'은 꼭 읽으라고 충고까지 해 주셨다. 

 

그런데, 솔직히 난 '기자수첩'이나 '칼럼'은 별로 읽지 않았다. 물론 간혹가다 김대중 논설위원의 칼럼은 읽은 기억이 난다. 내가 주로 읽은 기사는 '이규태 코너'와 '만물상'이었다. 스크랩까지 하면서 그것을 모아두고 읽었다. 이규태 코너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사람은 참 아는 것도 많다고 감탄하였다. 어쩜 저렇게 아는 것이 많아서 무슨 얘기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만물상은 그런 대로 세상 사는 지혜의 이야기가 있어서 자주 읽게 되었다. 물론 많은 지식적 정보와 함께 세상 사는 이야기도 종종 읽게 되어 훈훈한 감정이 일기도 하였다. 그 때, 우스운 것은 꼰대 몰래 조선일보를 스포츠 조선으로 바꿔 읽었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아버지 근무처는 강원도였고, 들킬 염려가 없었기에 그랬다. 꼰대가 토요일 오후에 서울로 상경하시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일요판 신문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염려를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일요일 날에 그만 아버지 한테 들키고 만 것이다. 네 마음대로 신문을 바꿔 읽으면 어떡한다는 둥 핀잔을 드러야 했다. 꼰대가 날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왜 스포츠 신문을 읽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공부는 안 하고 잡념이 들어가지고 무슨 공부를 하겠냐고 혼쭐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조선일보로 바꿔 보게 되었다. 

 

아마 조선일보를 재수할 때까지 보게 되었으니까 근 2년 가까이 구독한 셈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에 대해 뭐 특별히 어떤 의식과 비판적 시각에 입각하여 신문을 본 것이 아니라, 그냥 신문이니까 본 것이었다. 그리고 수확이라면 그때부터 정치인 개개인들에 대해 면밀하게 내 나름대로의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아마도 나의 정치적 시각(식견)이 뚜렷하게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 정치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 당시 내가 독서에 열중하고 있을 때여서 그런지 나의 머리 속에서도 저것은 이래서 잘못 되었고, 저것은 이래서 좋은 것이다라고 내 주관이 성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정치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감을 잡은면서 신문을 보니까, 신문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정치가들의 언변이나 그 수사학적 레토릭이나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오는 개개인들의 정치적 야망이나 신념, 그 밖에 정치시국에 관해 그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조금씩이나마 나의 사회적 안목과 어떤 이슈에 대한 나의 견해가 조금씩 나의 의식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을 내 스스로가 감지하게 되었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1993년도에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서 다시 조선일보와는 다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삼수까지 해 놓고서, 또 대학에 낙방한 나는 꼰대의 성화에 못 이겨 영장이 나오자마자 입영하게 되었다. 정말 1993년은 내게 있어서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 속으로 '그래, 군대를 도피처 삼아 몇 년간 사회랑 인연을 끝고서 모든 걸 정리하자는 심산'이었다. 내게도 그때는 별다른 꿈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냥 막연하게나마 문학에 대한 꿈을 안고 있었다. 나도 멋진 시인이 되어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책을 열심히 읽으며 시를 끄적끄적 거리다가 군대에 입영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그때의 심정을 말한다면 참담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회의 경쟁에서 낙오자 신세로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자괴감이 날 괴롭히고 있었다. 군대에서 모든 걸 잊자! 잊어버리자는 자포자기한 심산이 오히려 날 편히 군대 생활에 임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군대 내에서도 열심히 독서를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나에게 신이 베풀어주신 선물인지는 몰라도 자대배치 받은 곳은 시설도 좋았고, 생활하는 환경이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대가 부대인지라 훈련은 엄청 힘들었고, 매일 체력 단련과 교육 훈련의 연속이었다. 우리 부대는 여단소속 대대급이었는데 따로 병사들이 공부할 수 있는 조금만 독서실도 있었다. 이것은 대대장님이 손수 마련해주신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부대 대대장님은 문무를 겸비한 대단한 학구파셨다. 몇 권의 세계전쟁사도 직접 쓰셨고, 도해 손자병법도 손수 자신이 삽화와 함께 영문으로 출판하신 분이셨다. 이 분(노병천 예비역 대령)은 전집까지 가지고 계신 분이었고, 걸프전 때도 신문사에서 이 분에게 걸프전에 대해 해설을 청탁하실 정도로 우리 나라에선 병법 전문가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셨다. 내가 자대배치 받고 일년 후에 대대장님은 전쟁을 수립하고 계획하는 합창으로 발령을 받고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워낙 인품도 뛰어나신지라, 대대 연병장에서 화려한 도열과 함께 그 분의 이송을 모든 장병이 슬퍼했다. 이때 난 대대장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손자의 [손자병법],그리고 현대전의 전략가로 명성이 자자한 리델 하트의 [전략론]을 읽게 되었고, 그후 수 많은 전쟁사를 직접 책을 찾아보며  전쟁에 대해 간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 군복무에 임하고 있을 때도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계속 되었다. 우연찮게 일 년이 지나서야 소대원 내무반에서도 신문 보는 것이 허락되어 우리 내무반은 스포츠 조선과 조선일보를 덤으로 읽게 되었다. 워낙, 군대라는 곳이 그런지라 그 당시 조선일보 밖에 신문이 들어오질 않았다. 장병들이야 조선일보 보다는 스포츠 조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간혹 대학에 다녔던 병사들은 조선일보를 보지만 다들 스포츠 조선에 눈독을 들이고 보게 된다. 그 만큼 그들에게 연예*스포츠는 재미를 더해 주는 일종의 오락거리였던 셈이다.

 

그때도 난 정치적인 기사에 주안점을 두고 신문을 읽었다. 이런저런 기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인 일면 헤드 기사랑 정치인들의 행적에 중점을 두며 읽었다. 마찬가지로 그 때도 조선일보에 대해 난 특별히 어떤 문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본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체 기능에 다를 바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사회면에 올라와 있는 세상 얘기를 보면서 바깥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복무할 당시, 한 가지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한국논단>이라는 잡지였다. 무심코 그 잡지를 손에 넣고서, 아니 논단이라는 그럴 듯한 제명이 솔깃하기에 읽어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군대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를 명명백백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그 때는 정부에서 발간하는 잡지도 아닌데 이런 데까지 들어올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그 잡지를 읽을 때 그런 의심은 접어둔 채, 잡지 후반부에 소개되는 사상가나 철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읽었다.

 

기억나는 철학자로는 프랑스 철학자인 미셀 셰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철학자를 처음 접하게 된 지라 호기심 차원에서 글자 하나하나 세심하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밖에도 여러 명의 철학자나 사상가를 그 잡지를 통해 알게 되어 그나마 인문적 교양잡지로선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앞부분에 이도형이라는 발행인이 쓰는 '권두논단'이라는 글들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읽다가도 열불이 나서 여러 번 냉팽겨치고 싶은 유혹을 여러 번 참아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혀 그 사람의 글에는 수긍할 수 없는 억지가 태반이었다. 내가 전부터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 곱깝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완전히 칭찬 일변도가 지나쳐 찬사에 가까운 논지를 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잡지의 성격이 어떤 걸까 하고 이 잡지를 읽으면서 많은 골머리를 썩힌 기억들이 지금에 와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군대 내에서도 조선일보를 계속 접했고, 그리고 <한국논단>이라는 잡지를 처음 알게 된 이후 난 두 매체에 관해 좀더 깊은 맥락적 의심(의미)을 품게 되면서 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995 년 도에 전역한 후에 ,난 원주(전역할 당시 우리집은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시내에 있는 시립 도서관을 전전하며 여러 철학책과 인문*교양*시사 잡지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그때 난 처음으로 [말]지를 접하게 되었고, 여태껏 내가 마음 속으로나마 품고 있었던 의구심들이 조금씩이나마 <말>지를 통해 해결해 나갔고, 내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문제 의식(인식)들이 <말>지를 접하게 되면서 스스럼 없이 풀려나갔다. 그리고 그 잡지를 읽으면서 진정, 일반 국민들이 많이 봐야 하는 잡지가 돼야 우리의 사회가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주에서 일년 간 빈둥대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내가 조선일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보게 된 것이 신문배달을 하면서 부터였다. 내가 1996년도  9월달에 서울에 올라가서도 빈둥거리며 두 달을 놀다가, 곤궁해진 나머지 아르바이트 삼아 그해 11월 부터 <동아일보>와 <매일경제>를 돌리게 되었다. 그 당시 난 4구역을 돌리게 되었는데, 서울 정릉2, 3, 4동 전 구역에 걸쳐 400부 넘게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하게 되었다. 한 구역만 돌리게 되면, 시간적으로 손해고 금전적으론 여력이 안 되어 부득불 부수를 많이 돌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편하게 다른 일도 할 수 없었기에 신문배달을 하는데 새벽 시간을 몽땅 투자했다.

 

신문을 돌리다 보면 같은 구역 내에 다른 신문을 돌리는 배달원들을 조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여러 종류(조선,중앙,한국,경향,한겨레..등등)의 신문을 접하게 되었다. 왜냐믄 다른 신문을 돌리는 배달원들에게 한부씩 꼭 얻었기에 말이다. 3구역 이상 돌리다 보면 다른 신문을 돌리는 이들의 신문은 몽땅 얻어볼 수 있어서 난 공짜로 모든 신문사가 발행하는 신문을 거진 보게 되었다. 근데 몇몇 경제 신문지는 빼 놓고 말이다.

 

그럼 다 돌리고 난 다음, 그렇게 얻은 신문을 고시원으로 가지고 와서 모든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각각 신문들의 논조와 편집 방향에 대해 비교 분석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고 각 신문사의 논지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한 사실에 대해 각 신문사들의 입장이 서로 교묘하고도 판이하게 다른지를 알게 되는 눈이 트인다고 할까. 사진 한장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헤드라인 문구 하나 하나가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그 신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마수가 그대로 보이게 된다.

 

그럼, 헤드라인 선정(편집) 과정에서 어느 것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또 어떤 것은 그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1997년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이회창을 밀어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난 그때 신문을 반년 간 돌리고 나서야 신문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정말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특히, 조선일보의 북풍공작은 편집과정에서 고도로 집적*조작 된다는 인상을 여러 신문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태껏 무심코 보았던 조선일보라는 실체가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분노하게 되었고, 그 당시 무의식적으로나마 신문은 조선일보가 최고다는 고정관념을 그때부터 내 머리 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그 당시 신문을 배달하면서 느낀 것은 바로 언론이란 것은 그 사회적*의미적 맥락에서 전혀 좌시할 수 없는 크나큰 우리의 사회문제라는 것을 뚜렷이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조선일보를 보고서 느끼는 것은 생각할 거리가 없는 아니 쓰레기라고 생각하기에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예전에 신문을 돌리면서 신문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많이 약화된 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의 언론 수준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조선일보라는 신문(저널리즘)의 속성을 알게 되었다는 자족감이 분노보다는 오히려 우리 나라의 최고*최대 신문이라는 사실이 그저 한 편의 블랙 코메디 같았기에 말이다. 

 

P.S : 그 당시 신문을 7개월 동안 돌리면서 느꼈던 문제점은 어떤 독자가 그 신문을 선택한다는 것이 능동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이라는 데에 있다. 신문의 논조나 논지를 보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문사의 판촉요원이 나가 선물 꾸러미와 무가지를 서비스주는 기간의 혜택에 따라 혹은 구독료에 따라 구독자가 수동적인 입장에서 선택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신문이 내가 보는 관점이거나 아님 저 신문을 통해 내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게 많구나 하는 가치적 기준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와 같은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는 현실이다. 물론 일부 독자들 중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오랫동안 한 신문만을 선택하여 보는 이들도 있다. 그 부류들은 대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거나 아님 예전부터 그 신문만을 오래 전부터 구독해온 독자들 뿐이다.

 

그 밖에의 독자들은 수시로 신문을 바꿔 본다. 왜냐면 서비스 기간이나 선물 그리고 구독료에 따라 비교 우위에 놓고 신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 어떤 신문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이 알려면 신문 속에 들어가는 전단 광고지(일명 찌라시)의 양을 보고 판단하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당시 조선,동아,중앙일보에는 언제나 전단지가 대 여섯장이 고정적으로 박힌다. 그런데 한겨레 신문에는 전단광고지가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있다고 해도 간혹가다 한장 들어갈까말까 했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알고 보면, 신문의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식자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문제를 논할 때, 그 유통 메커니즘과 일반 독자들에게 신문이 어떻게 구독되어지는 것 또한 심층면밀히 연구되어져야 할 과제이다. 단지 조선일보의 내용 갖고서만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말이다. 조선일보야 워낙 돈이 많으니까 물량공세를 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언제나 타 신문에 비해 월등히 많이 들어간다. 지금 중앙일보가 어느 면에서 앞서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영향 면에서 역시 조선일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만약, 조선일보가 우리 나라에서 꼴지의 구독률이라면 문제는 엄청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돌렸던 지역(정릉2,3,4동)에도 역시 조선일보가 많이 들어갔다. 그 다음에 동아와 중앙이 엇비슷한 수준으로 들어갔다. 역시, 조선일보가 많이 들어가는 데는 잘 사는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한겨레는 대학가에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신문을 돌리다 보니깐, 본의 아니게 유명 인사들의 집도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도 신문을 돌리면서 두 명의 유명 인사의 집에 신문을 넣었는데, 전 국회의원인 유재건(집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고 크다) 씨와 탤런트 이세창의 집이었다. 그 당시 이세창은 국민대학교 앞 동네였던 배밭골에 살고 있었다. 종종 새벽에 이세창의 차와 몇 번 마주치기도 했다. 역시 그 당시부터 카레이서에 관심이 많았던지 그의 자동차는 일제 스포츠카의 한 종류인 이클립스였는데,  정말 차 멋있었다! 집은 허름한 빌라에 살아도 차는 기똥찬 것을 몰고 다녔다.

 

https://youtu.be/xcyrGn81N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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