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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소설/대본] 막내 이모와 막내 삼촌 2
2022.10.29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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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172445

(2015년 페북글)...방금 전에 막내 이모가 카톡을 보내왔다. 내용인 즉..."오랜만이지. 막내이모야. 추석명절 잘 보냈어? 이모도 바쁘다 보니, 연락을 못 하는구나. 아빠 엄마 건강하시지? 많이 힘들지? 힘들지만 살아야 하잖아. 항상 마음을 밝게 하고 살아. 알았지? 오늘도 화이팅~~^^"

 

작년에 자식을 잃은 상심에 내가 방황할까 봐, 십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던 막내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은 추석 연휴라서 연락하신 것 같다.

 


무심하게도, 난 그때 막내 이모의 카톡에 대해 일절 답신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카톡이 낯설었고, 무심코 지난 세월이 어색했기에 뭐라 응답할지 난감했다.

 

https://youtu.be/XIycEe59Auc

 

막내 이모와 막내 삼촌과 얽힌 추억들...유년 시절, 막내 이모와 나는 그야말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였다. 나이 차이는 열살 내외였지 싶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이모가 고등학교 여고생 시절이었지 싶다. 외할머님 댁(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지구리)에 방문하면, 난 언제나 막내 이모랑 같이 자게 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지 싶다. 막내 이모가 꼼지락거리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난 이모가 뒷마당의 툇마루로 연결된 방문을 조용히 열고 나가는 모습에 덩달아 툇마루로 황급히 내달려 이모에게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이모 같이 가"...내 목소리에 놀란 이모가 힐끗 나를 째려 보며, 자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서 '쉿' 하는 거였다. 이모는 뒷마당으로 연결된 부엌문을 열고 툇마루랑 연결된 작은 문에서, 업을 자세를 취하고 얼른 업히라며 등을 내밀었다.

 

그렇게 이모의 등에 업힌 채 부엌을 유유히 빠져 나오면, 이모는 볼멘소리로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면서 내 연약한 넓적 다리를 손가락으로 힘껏 꼬집었다. 그럼 난 '아야!' 하면서 징징거렸다. 가로등 불빛 하나 서 있지 않던 시골 마을의 한적한 밤길을 이모의 등에 업힌 채 걷는 이유는 이러했다. 옆집 건너편에 텔레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야밤에 몰래 빠져나온 거였는데, 그만 나한테 들키고 말았던 거였다. 막내 이모는 그렇게 한동안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자기 등을 얄미운 조카에게 내맡기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게 되었다.

 

내가 초딩 6학년 때 급성 간염에 걸렸는데, 경기도 연천에 있는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이모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강원도 철원까지 와서 엄니 대신 일주일간 나의 병수발을 들었다. 링거 투여할 때마다 이모가 내 오줌을 받아냈는데, 좀 창피했다. 아무튼 그랬다.

 

초딩 저학년 시절엔 막내 이모와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일 정도로 다퉜지 싶다. 무엇보다, 막내 이모에게 고마운 것은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막내 이모 덕분이었지 싶다. 이모는 고등학교 졸업 기념이었나 3학년 겨울방학이었지 싶은데, 큰 언니(엄니)가 있는 철원에 놀러왔는데, 그 해가 1979년 아니면 1980년이었지 싶다. 그때 막내 이모의 손에 이끌려 극장문을 난생 처음 들어서게 되었다. 그 때 내가 초딩 1학년이었지 싶다. 그렇게 처음 본 영화가 외화(챔프, 1979)였다. 그 경험으로 인해, 난 초등학교 때부터 극장을 드나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막내 이모를 통해 '최루탄' 가스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1987년)는 한참 민주화의 물결이 온 서울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깐 촌(철원)에서 살다가 민주화의 봄을 서울에서 맞게 되었다. 촌에서 처음 대도시로 전학을 가게 된 나(촌놈)는, 도대체 그놈의 최루탄 가스 때문에 엄청 고생을 하게 되었다. 난 그것을 처음 어린이 대공원 후문(구의동)에서 맡고 그것이 최루탄 가스인 줄은 미처 몰랐다. 왜냐하면, 선천적으로 편도선이 나쁜지라 또 목감기가 왔구나 했다. 근데 한여름인 데도 목감기라니! 속으로 난 생각했다. '젠장, 서울이라는 곳은 공기가 얼마나 탁하길래 나의 연약한 목이 여름에도 다 아플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막내이모에 의해)이지만, 그것이 '최루탄 가스'라고 불리는 정체불명(난 그때까지 그것의 실체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의 것이었다.

 

아무튼 막내 이모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고, 최루탄 가스의 실체도 알게 되었다. 그런 막내 이모가 이젠 육십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셨다니, 세월 참 빠르다!

 

+

 

작은 외삼촌(은 작은 이모의 오빠)과 얽힌 추억...나의 작은 외삼촌도 이젠 육십 중반이다. 언제나 내 부모님보다 내 장래에 대해 더 걱정을 많이 하셨고, 진로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친부모 이상으로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 주셨던 분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외삼촌 하고의 첫 기억은 아마도 대여섯 살 때였을 거다. 공교롭게도 외할머님 댁에서 생일상을 받았는데 작은 외삼촌은 생일 선물로 내게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선물로 사 주셨고, 저의 타격 자세나 투구폼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흘러 외삼촌이 학군으로 임관해서 강원도 전방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고, 첫 휴가차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 그 전에 외삼촌이 임관 하기 전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작은(윗 글에 서술한 작은 이모의 언니) 이모와 함께 면회를 간 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외삼촌이 첫 외박 휴가를 나왔을 때가 아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그 당시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아마도 1979년이었을 거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근무지가 강원도 철원이었기에, 외삼촌이 큰 누나집으로 휴가차 들렸던 거다. 외삼촌이 그때 내게 신기한 걸 보여준다면서 날 이불 속으로 손을 이끌었고, 컴컴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깜박깜박 켜 보였다.

 

그게 뭔가 했더니만, 전자시계였다. 난 그때 전자시계를 처음 접한 나머지 신기했다. 그 당시 바늘 손목 시계만 보았던 나로선 시계에서 불빛이 반짝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작은 외삼촌은 나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참 쳐다보더니만 내 팔뚝을 잡아당기더니 이내 손목에 차주는 것이었다. 이거 선물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자시계를 차고 있는 모습 또한 사진에 담아주셨다. 그렇게 외삼촌이 무사히 전역하고서 시골 집(강원도 안흥)에서 취직 시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나는 여름이나 겨울방학을 맞이할 때면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곤 했다. 그 때 외삼촌과 같이 앞 냇가로 같이 멱을 감으러 다니거나, 어항을 가져가 물고기를 잡곤 했다. 그때 작은 외삼촌은 군대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그런지, 제대하고서 속병(췌장염)을 앓고 있었다. 병이 나서 휴양차 집에서 요양하면서 취직 시험(외삼촌은 건축토목학과를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삼촌의 학창 시절을 잠시 얘기하자면, 솔직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원래 작은 외삼촌은 안흥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제자였다. 학창 시절, 외삼촌은 공부도 잘 했고 시골 학교지만 전교학생회장 출신이었다. 중등학교까지는 안흥에서 나왔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외할아버 님과 갈등이 있었다. 당시 외삼촌은 인문계를 진학하고 싶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부득불 공업 계통의 고등학교로 외삼촌을 보냈다는 것이다. 차후에 안정적인 가정을 가지려면 인문계보다는 이공계의 기술 계통이 낫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안흥(횡성)은 원주랑 지척인데, 그 당시 원주에는 공업고등학교가 없었는지, 충주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하숙을 하면서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작은 이모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면, 외삼촌은 하루라도 학교에 갖다와서 울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한다. 그렇게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울분으로 채웠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외삼촌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내가 이것을 잘 아는 이유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이때 외삼촌은 대학교 도서관에서 취직 시험에 열중하기 위해 안흥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막내 이모와 함께 집을 얻어서 서울 구의동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때였다), 방학을 맞이하여 서울에 가면 항상 외삼촌은 정치에 대해 이것저것 말씀을 많이 하시는 걸 여러 번 보았기에 말이다. 그때 나는 외삼촌으로 인해 여러 유명한 정치가(김영삼, 김대중, 이민우, 이철승, 김종필)들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리고, 여러 시국에 관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열띤 토론을 펼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외할아버지도 5.16 구데타 이전에 민선(?) 면장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치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외삼촌은 운동권은 아니었어도, 항상 정치나 시국에 대한 안테나가 민감하였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H건설에 다니면서 퇴근해서는 성균관대 도서관에서 틈틈이 법률 공부까지 하셨다. 왜냐하면 정치(국회의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외삼촌의 태생적 약점은 횡성(안흥은 횡성군에 포함된 면소재지) 지역구는 횡성중*고 동문들이 꽉 쥐고 있을 뿐더러, 홍천과 통합된 지역이라, 지역 동문의 도움 없이는 어렵다는 한계를 깨달은 것인지, 그 꿈을 그만 접고 말았다. 외삼촌은 자기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던 것이 외할아버지가 공업계 계통의 고등학교에 보낸 것이기 때문이란 걸 이모님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 외삼촌이 십여년 년 전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물론 자신의 야망에 대한 좌절에서 오는 자괴감을 피력한 것인지..."그나마 내가 이렇게 안정된 직장에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 때문에 그렇다고'...그때 외할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공업 계통의 학교에 들어간 것이 어쩜 자신에게는 더 좋았던 게 아닐까 하셨다.

 

참, 그 말씀을 듣자니 참잡함이 나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삼촌은 누구보다 나의 장래에 대해 항상 용기를 심어주셨던 분이었기에 말이다. 나의 고딩 시절에도 항상 나의 학업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써 주셨고, 내가 중학교 입학하기도 훨씬 전인 초딩 5학년 때는 부모님도 안 사주시는 기초 영어책을 손수 사주시면서 영어 알파벳을 쓰게 했다. 

 

외삼촌이 취업준비할 당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서울 구의동에 같이 상경하여 외삼촌을 뒷바라지 하며 생활하게 된 것도 알고보면, 외할아버께서 자기 아들에 대한 원망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은 심정에서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외삼촌은 췌장염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였고, 취직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삼촌의 병 간호(손수 삼촌을 이끌고서 병원에 다니셨던 걸 기억한다)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같이 동행했던 걸 기억한다. 그때의 외삼촌을 기억하기론 그 어느 때보다 삼촌이 무섭게 느꼈졌다. 그렇게 다정다감했던 외삼촌이 내 학업에 이래저래 신경을 쓰시면서 수학 문제를 하나라도 못 풀면 화를 내셨기에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즘에 외삼촌은 H건설에 입사하였고, 나는 철원에서 서울로 전학(중 3때)을 가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까지 나는 외삼촌을 별로 뵐 기회가 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외삼촌은 역시나 내가 첫 대입 학력고사(90년 12월)을 치룰 때, 잊지 않고 전화를 주셨다. 시험을 잘 치루라는 말씀과 함께 무슨과를 지원하느냐, 하면서 물어오셨다. 그 해에 외삼촌은 결혼을 하셨는데, 내게 그톡록 신경을 많이 써 주셨는데, 나는 외삼촌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무심한 조카였다.

 

그해 나는 대학에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 삼수 끝에도 대학에 낙방했을 때도 외삼촌은 내게 무얼 제일 하고 싶냐고 묻길래, 저는 그냥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만, 외삼촌은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얘기(이문열의 예를 들면서)를 해주시면서 대학에 낙방한 것에 대해 괜찮다고 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못난 조카에게 용기와 패기를 가지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아버지에게선 비아냥거리는 핀잔만 들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때 당시 아버지는 날 보면 머릿속에 잡념만 가득 들어서 어디 공부를 제대로 하겠냐며 나무랐고, 나의 어머니는 나의 학업에는 무관심 그 자체였다. 재수 삼수 때도 항상 외삼촌이 전화를 하셨지만, 나도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이 몹시 날카로운 상태여서 어머니가 외삼촌의 전화라고 하면서 받으라고 했을 때, 안 받겠다고 신경질을 부렸다.

 

맨날 자기 자식도 아닌데 나한테 유독 신경을 쓰시는 게 나로선 못 마땅하였다. 삼수를 했는데도 대학에 낙방한 군대에 곧바로 입영했다. 도피처 삼아 말이다. 아니 그때 그 심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오자마자, 난 작은 외삼촌을 찾아 뵈었다. 외삼촌이 첫 휴가차 날 찾아던 것처럼 나도 첫 휴가를 나오자마자 외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무사히 저는 전역(95년)을 하고 일 년 후에, 나는 가정 일로 연락을 끊고 자의반 타의반 가출을 하였다. 그때도 내가 고시원(정릉에 있는)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아시고 외삼촌이 찾아왔던 거다. 그 당시 이모님이 서울 정릉에 살고 계셨는데, 이모님께 내가 있는 곳을 말씀도 안 드렸는데, 아마 정릉 근처에서 내가 돌아다니는 걸 사촌 여동생이 봤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몇 번 사촌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아는 체를 안 했기에.  아무튼 외삼촌이 이모님을 통해 내가 정릉에 있다는 걸 알고서 사촌 여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의 고시원을 수소문 끝에 날 찾아내고는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자면서 날 이끌고 나갔다. 

 

그때 외삼촌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했다. 한의학을 배울 겸 해서 중국에 유학 가고 싶지 않냐고 건의해 오셨다. 외숙모의 동생 중에서도 한의학과를 나오진 않았지만 중국에 유학가서 한의학을 배울려는 데, 한의학을 배워오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하시면서 너도 같이 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삼촌의 제안을 거절했고, 계속 문학과 영화공부를 하겠다고 생고집을 피웠다. 외삼촌은 못내 좋은 기회를 거부하자 아쉬워 하는 눈치셨지만, 삼촌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그래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라고' 하는 격려의 말씀만 하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내게서 아무런 성과가 없자 삼촌은 더 초조해지셨나보다. 1998년에는 자신이 영종도 다리 공사를 하고 있는데 하청 업체에 근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오셨다. 기술도 필요 없고 관리직인데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니까 한 번 근무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다. 이 제안 또한 내게 직접 물어온 것이 아니라 이모를 통해 나의 의중을 타진했다. 물론 그때도 적성 운운하며 외삼촌의 제안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난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고, 싸돌아다니다 보니 계속 안 좋은 일만 겹치고, 심신이 무척 지쳐 있었다. 어느 해 여름에 외삼촌이 보고 싶어 찾아 뵈었는데, 그만 술이 들어가자마자 외삼촌과 외숙모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외삼촌은 그걸 애써 외면하셨고, 외숙모가 우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재우가 요즘 몹시 힘들구나' 안쓰러워 하시며 나의 등을 도닥거려 주셨다.

 

그 다음 날, 떠날 채비를 하자 외삼촌은 하루 더 있다가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한사코 가겠다고 나섰다. 외삼촌은 아파트 정문 입구까지 날 배웅하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구' 했지만, 난 도저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해(2002년) 추석이 지나고 집에 잠시 들렸을 때, 엄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추석을 세고 엄마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외삼촌을 만나뵈었나 보다. 내가 삼촌을 찾아가서 울었던 이야기를 했나보다. 이제는 그런 일로 찾아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나는 외삼촌이 이제 내게서 두 손을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기사 나는 그런 말을 삼촌에게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못난 조카이기에 말이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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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9 05:33
    베스트

    작가기질과 문장력이 넘칩니다....

     

    소설을 쓰세요...단편소설을 쓰세요

     

    밥벌이 안됩니다

     

    장편소설을 몇편쓰세요

     

    밥벌이 겨우 될지도 모릅니다..

     

    영화 시나리오 쓰세요. .

     

    밥벌이 어쩌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드라마 대본 쓰세요....

     

    히트작 아님....밥벌이 안됩니다..

     

    그러다가 

     

    웹툰 스토리작가가 되십시오...

     

     

    충분한 밥벌이 되실 겁니다....

     

    이런 과정 거치고 밥벌이 되는 시점

     

    50이 넘어서...

     

    대한민국의 예술세계..창작세계 참 어렵습니다...ㅠㅠ

  • 이지튀르 작성자
    2022.10.29 05:57
    베스트
    @다산선사

    제 꿈이 시에서 최고 작품을 남기고
    단편 소설에서 최고 작품을 남기고
    시론(철학적 담론)에서 최고 팜플렛을
    남기는 게 꿈입니다.

    시에선 비명(부제 '별이 없는 밤')이 최고라고 썼고
    이제 단편 소설로 '라일락 꽃 필 무렵'만 쓰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시론은 너무 제도권이라
    제 담론은 재야에서만 인정받는 수준.ㅎ

    장편 소설은 제 역량이 미흡한 관계로 일찍 포기.ㅠ
    전 시나리오보다 영화 제작과 연출에 욕심이.ㅎ

    한때 명계남 씨와 함께
    허영만의 '오! 한강'을 제작하여
    영화로 만들어보려 했지만 무산.ㅋ

    암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