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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04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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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05762

군 전역 이후 2002년까지 정신적 수도승(구도자)처럼 살았다. 쓰라린 아픔을 맛보았던 2002년까지 그렇게. 1996년 여름부터 시작된 고시원 생활은 수도승처럼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해 가을부터 시작한 신문배달은 그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되었다. 여러 신문들을 두루 읽는 재미로 보내던 시절이었다. 몇몇 경제지를 제외하고 모든 신문들을 고시원으로 가져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그리고 한잠 자고서 새벽을 여는 생활이 쳇바퀴 돌듯 그러했다.

 

그러는 사이 작은 외삼촌이 느닷없이 고시원을 습격했다.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날 이끌고 나갔다. 외삼촌이 좋은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다. 내가 기거하는 고시원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자, 정릉의 숭덕초등학교에 다니는 사촌 여동생의 첩보가 빌미가 되었다. 고시원이 숭덕초교 근처라 길가다 우연히 사촌 여동생과 몇 번 마주쳤지만 아는 체를 안 했다. 사촌 여동생은 내 존재를 자기 엄마(이모)한테 알린 모양이고, 그게 작은 외삼촌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거다.

 

몇 달 동안 집에 연락도 없이 생활했으니깐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할 만도 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어무이와 모종의 타협을 맺고서 신문배달을 접게 되었다. 1997년 12월까지 고시원에 처박혀 책을 읽거나 정독도서관을 왔다갔다하면서 이것저것 끄적거리며 노트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IMF가 터졌지만 난 변함없는 삶을 이어나갔다. 

 

나의 첫사랑을 만나던 그해 12월 초순. 그 소녀는 추운 겨울에 가출했고, 서울역에서 전단지를 보고 찾은 곳이 내가 있는 고시원이었던 모양이다. 일 년 전에 가출했던 나와 그렇게 고시원에서 인연이 되었던 게다. 가출의 원인은 둘 다 집안 사정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성격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어무이의 우울증으로 인한 가정붕괴, 그 소녀의 가정은 IMF 여파로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부모님이 자주 다투던 모습을 보여줬나보다. 그 소녀는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기에 그리 짐작하는 게다...세상은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돈만 바라보며 살까.

 

그 소녀는 다행히도 부모의 손에 붙들려 내려갔지만, 같이 살겠다는 굳은 의지로 가출을 두 번 더 감행했다. 내 자취방에서 사십일 가까이 생활하는 동안 자잘한 일상 생활은 배제되었다. 삼시 세끼는 물론이거니와, 같이 맛있는 걸 오손도손 먹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깐. 씻는 것이 불편하여 난 그 소녀를 삼일이 멀다 하고 목욕탕에 보내는데 바빴다. 

 

나와 그 소녀의 주된 생활은 이러했다. 그녀가 잠시 비됴숍으로 알바를 나가면, 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그녀가 알바에서 돌아오면 비디오숍에서 빌린 영화들을 같이 보고 밤이 찾아오면 사랑을 나누고, 그렇게 40일 가까이 그런 생활이 반복되자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저 같이 붙어있는 생활 그 자체였다. 어떡해서든 그 소녀를 집에 돌려보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고, 그런 빌미를 찾아 떠난 보낸 이후로 그는 후회했지만 별 수 없었다. 내 첫 연애 상대가 내가 그토록 영화 속이나 문학책 속에서 바라마지 않던 대상이 갑자기 나타나자, 난 그 상황에 당황했다. 무엇보다 그 소녀는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우리 엄니가 우울증으로 인해 장기간 병원에 계시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난 그 소녀와 결혼식을 올렸을 게다. 그렇게 살 바에 그 소녀의 엄마는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기에.

 

라일락꽃 내음이 진동하던 그해 4월, 성당 담벼락을 지날 때마다 난 그 소녀에게 라일락 꽃향을 맡아주곤 했는데, 그 당시 그 황홀한 향기를 풍기던 라일락의 정체를 난 몰랐기에, 그 소녀에게 물었지만 그녀 또한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소녀는 알바를 끝마치고서 돌아오자마자 내게 라일락꽃 한송이를 내밀며, "오빠야! 이 꽃이 라일락꽃이래" 하는 거였다.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나 날 기쁘게 해 줄려는 그녀의 마음씨가 너무 고왔고, 저 너머의 이데아처럼 영롱했기에.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 내 선택은 옳았지 않나 싶다. 외로움 때문에 내 욕심만 채웠다면 그녀의 인생은 불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바람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로 자란 그 소녀를 보면서 난 흐믓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플 지라도. 그녀 또한 그토록 마음 아팠기에.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나보다 결혼을 늦게 한 걸 알고서 아차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찾아가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난 그러질 못했다. 모든 면에서 난 자신이 없었다. 사는 것 자체가 나에겐 힘든 이유였으니깐. 그걸 누군가의 짐으로 덜게 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소녀는 비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재우는 참 이상한 아이"라고.

 

https://youtu.be/aRNYHXKfHBI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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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5 01:33
    베스트

    밑에 음악을 먼저 틀어놓고 글을 봤습니다. 음악과 글이 잘 어울립니다. 라일락 부분에서 아련한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재미있네요 

  • 이지튀르 작성자
    2022.09.05 06:30
    베스트
    @Pinkfloyd

    그럼 라일락 관련 한 곡 더  들어볼까요. 제프 버클리가 부르는 라일락 와인 입니다

     

    https://youtu.be/lNTRecJPukk

  • 이지튀르 작성자
    2022.09.05 06:39
    베스트
    @Pinkfloyd

    스테판 더피의 느김이 좋은  곡도을 한 곡 더 링크시켜 봅니다.

     

    https://youtu.be/JD2hOykPNGQ

  • 2023.04.21 04:25
    베스트

    이 이런사연이..

  • 2023.04.21 06:39
    베스트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