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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4.07.0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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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5125103

오늘 산책 중 엠장기획 팟캐스트를 듣다가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세 음절을 듣는 순간, 강렬한 기억 속 이미지가 몇 개 뇌리를 스쳤다. 

바람 불던 밤 거리 / 촛불 아래 마주한 그녀 / 찬란한 빛 사이로 멀어지는 실루엣 / 기이한 조형물과 아련함. 그 네 개의 이미지는 내게 한 여자를 떠올리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게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 거의 동일한 이미지들이다.

 

오래 전 나는 해외여행 중이었다. 먼 타국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인연 하나로 그 여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친구 두 녀석과 여행을 왔고 그녀는 혼자 여행 다니던 중이었다. 밤이 늦었지만 우리는 도심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탑을 가보자는 결정을 했다. 네 사람이 걷다보면 아무래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걷게 된다. 두 친구 녀석은 앞서 걷고 있었다. 나는 예의상 낯선 사람의 말동무가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 곁에 붙어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탑으로 올라간 후 별다를 것 없는 야경을 살피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잠깐의 대화를 나눠서인지 그녀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호감이 수십년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우리가 그날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밤이 되면 전등을 쓰지 않았다. 밤 10시 넘어 도착한 우리는 간단하게 세수만 할 수 있었다. 다행이 쌀쌀한 동유럽의 5월 밤거리를 걷다온터라 샤워까지 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허기 탓에 친구들과 배낭 안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내 먹으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주방에 뭔가를 가지러 가고 있었다. 그때 막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와 마주쳤다.

 

좁은 복도, 전등 대신 촛불을 나열한 은은한 불빛 아래 그녀를 아주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냥 스쳐지나간 것뿐이다. 하지만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강한 끌림을 느꼈다. 살짝 웃으며 지나가는 그녀와 가벼운 목례로 답했던 나. 하지만 내 심장은 가볍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와 요기를 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밤새 펄떡펄떡 뛰는 심장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 누군가 마치 내일 아침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 것마냥 이 소리를 불경처럼 외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해.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라고. 하지만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함께 짜고 어렵게 간 여행이었다. 그런 충동적인 결정은 걱정과 불안을 낳았다. 하지만 심장은 분명히 말했다. 그녀를 따라가라고. 그렇게 잠을 설치다 어느새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정대로 게스트하우스에서 마련해준 아침 식사를 먹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늦게 입실한 덕에 몰랐지만 그곳에는 생각보다 많은 투숙객들이 있었다. 이른바 '한인민박'이라 대다수가 한국 여행객들이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곳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 동행했던 남자에게 물으니, 아침에 혼자 다른 도시로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듯 "아, 네."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에는 기이한 웃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허탈함과 아쉬움이 극단적인 화학반응을 일으켜 실소가 된 듯했다. '이 또한 운명이구나. 그래 내 친구들을 버리면 안되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 잡았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서둘렀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너무 맑았다. 오전 10시임에도 마치 정오처럼 밝은 햇빛이 도심과 거리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큰 개를 산책하는 펑크족 커플. 너무도 친절하게 낯선 동양 여행객에 호감을 보이던 그들은 입마개 한 자신의 개를 자랑하며 만져보라고. 카페 안에서 책을 보고 뭔가 토론하는 청년들의 모습. 상쾌한 도심의 공기만큼이나 모든 정경이 말끔하고 빛이 나는 듯했다. 우리는 잔뜩 설렌 마음으로 오늘 여행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다만 나의 마음 속 기이한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어? 저 사람 어제 그 여자분 아니야?"

 

믿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우리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멎쩍은 웃음을 띤 채 허둥대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고 어디 가느냐 물었다. 그녀는 "바보같이 여권 든 가방을 숙소에 두고 갔어요. 다시 가봐야 해서. 즐거운 여행 하세요"라며 숙소를 향해 뛰어갔다. 

 

또 다시 아주 강렬한 갈등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해.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라는 속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유달리 미소가 환한 그녀. 우리를 향해 다가올 때 도심 가득 쏟아지던 빛은 마치 그녀가 모두 몰고 온 것 같았는데, 다시 그 빛과 함께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림 속 환한 피사체 바깥 어느 배경 속 사내처럼 쓸쓸히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의 재촉에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행 내내 그녀에 대한 강렬했던 끌림을 잊을 수 없었다. 여행 막바지, 문득 우리끼리 여행지에서 만난 여성 중 호감을 가진 적 있었는지 이야기 나눈 적 있었다. 두 녀석도 사실 호감을 가졌던 여성들이 있었다. 나도 조심스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두 친구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 여자 되게 별로였잖아!"라고.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되레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나도 두 녀석들이 좋아했던 여자들이 별로였다고 생각했으니까. ^^;;

 

여행중 스페인 몬주익 언덕 국립궁전을 갔을 때다. 우리는 그곳 광장 계단에 앉아 과자와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저 멀리 기이한 조형물을 하나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갑자기 울고 싶을만큼 어떤 사람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 강렬했던 그녀에 대한 호감이 '미련'으로 바뀌었던 걸까. 그때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1시간 넘게 나란히 걷고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이름 한 번 물어볼 생각조차 안했는지. 그녀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리고 그때 그녀를 따라 나설 용기가 없었기에, 나는 그 여자를 이제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걸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에 사랑다웠던 첫번째 짝사랑이 끝이 났었다.

-

 

지금이라도 찾아보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그때 그 청년은 이제 내게 없다. 그새 취향도 사정도 마음도 달라진 한 아저씨만 여기 남아 있다. 다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토록 강렬하게 사랑에 빠지고, 또 통렬하게 그리워하다 감옥 같은 미련에 빠질 수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누군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을 비웃는 냉혈한이 되지 않도록, 나를 비로소 사람으로 만들어 준 그 추억이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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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6 02:21
    베스트

    좋은 추억이십니다.

    그녀를 따라 나셨더라면...

     

     

     

     

     

     

     

    간 빼가려는 거야.jpg

  • 2024.07.06 02:29
    베스트

    비포썬라이즈

  • 2024.07.06 02:29
    베스트

    아쉽네요 

     

  • 2024.07.06 02:34
    베스트

    단편소설 한 편 읽는 느낌이네요'.

    강렬했던 그 느낌이 느껴지네요.

     

  • 2024.07.06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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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_5416.gif

    그때...그.. 청년은... 이..제..내....게..없..

  • 2024.07.06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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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워요.

  • 2024.07.0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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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추억 하나쯤은 기져야 ~~

    아름다운 글입니다

  • 2024.07.06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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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유튭에서 'How We Met'를 많이 보게 됐는데

    인연이라는 건 있나봅디다.

    무튼 💚💙💜

  • 2024.07.06 20:30  (수정 07.0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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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럴 때 생각나는 미국영화 속 명대사가 있어요..가뜩이나 외국이었으니까 ㅎㅎ 굿윌헌팅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야구장에서 명경기를 함께 보던 친구들을 놔두고 거기서 첨 만난 여자를 쫓아가며 한 말, "Sorry guys, I gotta see about a girl."  이 말을 멋지게 날리며 그 여자 분 따라가셨더라면 진짜 레전드였을텐데...ㅎㅎ 제가 다 아쉽네요 그럴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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