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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4.06.30 06:58  (수정 06.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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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498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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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er Werner Fassbinder.

 

스포츠 종목 중에 제일 파시즘 요소가 강한 게, 바로 축구이다. 역대 월드컵 본선에 오른 서유럽 국가 중에 독일이 최다 19(?)번 본선에 진출했다. 그 다음이 이탈리아가 15(?)번, 스페인이 12(?)번이다.

 

축구 종주국 영국이 겨우 8번인데 비해(영국은 골수 훌리건만 파시즘 같다), 이 세 나라(독일, 이탈리아, 스페인)는 월등히 높다. 공교롭게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태동한 국가이다. 스페인 또한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나라였다.

 

물론 월드컵 본선에 최고로 많이 진출한 나라는 브라질인데, 총 22(?)번이다. 그밖에 아르헨티나가 13(?)번이다. 월드컵 최다 우승국은 브라질인데, 총 다섯 번이다. 그 뒤를 이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네 번 우승했다.

 

브라질 축구의 비밀은 바로 모래 사장이다. 브라질 출신의 선수들이 개인기가 좋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볼을 차기 때문이다. 현재 브라질 축구가 예전에 비해 맥을 못 추는 이유는 축구 전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인기를 전술로 커버한다고 보면 된다.

 

아래의 글은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하던 그 때, 영화(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속 인서트(라디오 중계)가 들어가 있는 데 인상적이었다. 아래 글은 22년 정 안티조선 우리모두 영화 커뮤니티 영화방에서 내 부탁을 받은 검은비(님은 그 당시 독일 유학생) 님이 장문의 글을 써주셨다. 이 영화의 감독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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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검은비


제 목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파스빈더

 

이재우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얼마전에 다시 봤습니다. 나름대로 의미의 통일성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정말 난해한 영화여서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과정중의 생각'이지만 일단 올립니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라이너 마리아 파스빈더의 마지막 영화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던 그의 초기 작품들, 흑백영화들에 비해 화면에서 느껴지는 물질적인 풍요함이 생소하다. 그가 죽기전에 누렸던 명성에 걸맞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상업영화의 틀에 가까이 다가서 있거나, 적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이차대전에 패한 후 10년에 걸친 독일역사를 한 여성의 '결혼'의 역사와 병행해서 보여준다. 이 방식을 통해 "역사의 결"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 기묘한 연상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숨겨진 연인인 "에바 브라운"이 떠오르는 것이다. 같은 성을 공유한 이 두 여성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분명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브라운"이 나치를 상징하는 색이라는 것... 여기서 생겨난 "에바" 와 "마리아"라는 전형적인 여성상의 대립쌍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몇년전에 들은 독일계몽주의 이전시대에 관한  문학강의가 떠오른다.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들이 유난히도 많이 들으러 왔던, 새로 부임한 정교수(Ordinarius)의 강의였는데 얼마나 인기였던지 치과 대기실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중심주제는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여성상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대상화되는가였다.'여신들'(Goettin), 유혹적인 '이브'(에바), 성스러운 구원적 모성의 여인 마리아 그리고 중세시대에 박해를 받았던 마녀(Hexe)라는 "전형들"은 실재하는 여자와는 거리가 먼 기호적(상징적) 대체물들일 뿐이다. 물론 남성판타지의 산물이면서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종교적 담론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 전형들이 문학작품(주로 시)속에서 번갈아 가면서 가치체계의 우위를 점유했던 과정들은, 당시의 여성성의 담론의 발생과정과 그 역사적 함의, 그리고 이것이 관습에 반영된 구체적 형태나 경향성에 미친 영향들을 분석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파스빈더가 바로 이런 "여성성"의 담론의 전통안에서 또 하나의 "여성성"의 전형화를 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훑어보자면...마리아 브라운은 이차대전에 참전한 독일병사의 아내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 가난과 남루함과 굴욕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마리아는 생존을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미군전용바에서 소위 아르바이트라는 걸 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을 흠모하는듯한 한 흑인미군을 발견하고 먼저 접근한다. 남편의 전사통지를 받은 직후 마리아는 자신을 좋아하는 흑인병사와  급작스럽게 가까와진다. 그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태어날 아이가 짙은 피부색을 갖게 되리라는 것, 여기서 받게될 시선의 폭력같은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리아는 전전세대와 차이가 난다.)  

 

그러던 어느날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와서 흑인병사와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마리아는 병을 들어 흑인의 머리를  후려친다.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된 마리아는 법정에서 분명하게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숨어서 들은 남편은 자신이 살인범이라며 거짓자백을 하고 마리아 대신 감옥에 간다. (아이가 유산된 것인지, 그 이후 아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새출발을 하기 위해 마리아는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기차를 탄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는 이등칸을 뚫고 텅빈 일등칸에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혼자 앉아있는 프랑스인 사업가앞에 가서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며 동석하게 된다. 한 흑인병사가 나타나서 귀찮게 치근덕대자, 약간의 "영어"를 가지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마리아는 자신의 매력과 잔머리와 짧은 영어실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프랑스인 사업가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회사에 "통역"으로 취직한 그녀는 곧 천부적인 사업수완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녀 특유의 매력으로 사장을 사로잡는다. "살기 위해서" 라는 생존의 대명제와 성적인 욕구앞에서 그녀의 몸은 결혼이라는 제약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이러한 일견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일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찾아 면회를 꼬박꼬박 다니는 또 다른 규칙성과 공존하는 이율배반을 보인다. 그 사실을 알고 사장은 질투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그녀는 유능한 사업가로 성장한다.   

 

남편의 출소가 얼마남지 않았고 마리아는 미래를 계획하며 기뻐한다. 바로 그 무렵에 사장은 남편을 면회한다. 출소하는 날이 되어 남편을 마중간 마리아에게는 한통의 편지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남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마리아가 기댈 곳은 더 이상 없다.  인생의 의미도 사라진듯하다. 그래서 망가지기 시작한다. 싸늘하고 냉소적으로 변한 그녀, 생활의 리듬을 잃고 황폐해진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 동안 번 돈으로 산 집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돌아온다. 마리아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동안 잃.어.버.린. 시.간.들. 을 회복해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속옷차림의 마리아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부엌으로 간다. 가스불을 켜고 돌려서 끄는 대신 훅 불어 끈다. 흥분한 탓일까?

 

그 때 마침 회계사와 유언집행공증인이 찾아온다. 사장이 죽었으며 사장의 유산이 그녀와 남편모두에게 절반씩 남겨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깨닫는다. 남편과 죽은 사장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자신에게 가는 곳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 장면내내 라디오는 틀어져 있다. 축구중계를 하는 중이다. 

 

허구적인 약속위에 쌓아올린 맹세들, 이미 내용은 비어버린, 껍데기뿐인 계약관계나 상징적인 의미 - 과거를 버리지 않겠다는 - 가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이다. 흥분한 마리아는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부엌으로 간다. 

 

방문객들이 거리로 나섰을 때 "아우스, 아우스" 하고 열정적으로 해설자가 축구중계에서 독일이 월드컵 우승을 했음을 감동스럽게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엄청난 폭발음이 들린다.  이처럼 전면에 드러나는 줄거리는 마리아의 삶, 현재의 모습과 주위환경에 직접 관련된다. 이 줄거리에 병행해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서 영화는 중층구조를 갖는다. 소음과 비슷한 배경음들이 끊임없이 깔리면서 만들어내는 "Geraeuschkulisse"가 바로 그것이다. 그 중심에는 라디오가 자리잡고 있다. 라디오의 전신인 Volksempfaenger는 히틀러의 연설을 중계하는데 쓰였고, 모든 독일국민은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틀어져 있다. 사망자명단을 읽어내려가는 소리에서부터, 아데나워의 취임에 관한 뉴스, 음악등...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마리아 개인의 상황을, 전후의 정치적 역사적, 경제적 상황들안에 배치시키는 효과들을 가지고 있다. 이 배경음들, 즉 라디오방송을 이해한다는 것은 독일 전후역사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의 대화 속에 묻혀버리기도 하는 이 모든 단서들을 이해하려면 독일역사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이 전제된다. 원래 알아듣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더빙을 하는 경우라면 더더군다나 살리기 힘든 효과가 아닐까싶다. 

 

마리아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당시에 통용되던 코드를 완전히 뒤집는 전복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재적인 통일성이 결여된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어느 정도 여성해방의 기수처럼 자유롭게, 그러니까 전전의 독일여성들의 행동양식에 비추어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어 남편을 면회하는 시간이 오면 자신의 결혼에 대한 "의리"를 재차 다지고 그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은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중생활은 나름대로의 시스템이 있다. 중심 코드는 "결혼"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가치관"이다. "결혼"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과거의 약속" 또는 "과거에 맺은 계약"에 대한 충실함 내지, 충실해야한다는 자기암시 같은 것이다. 그녀는 이 "계약"의 내용을 "사랑"이라는 내용과 바꿔치기하면서 이에 확신을 갖는듯이 보인다.   

 

마리아에게서 한 개인의 사랑의 특별한 형태들, 개성적인 반응들, 최소한의 논리적 통일성들을 찾으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히 전통적인 행동양식에서 벗어난 그녀의 행위들의 모순이나 이율배반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움직이는 제일원칙이 미니멀한 투자에서 큰 이윤을 창출해내는 경제효과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본능적인 생존욕구를 통해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넘어서는 여자들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상당히 닮아있다. "억척어멈"의 경우처럼 자식들은 아니지만 마리아도 줄줄이 달린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 그녀의 즉흥적이고 도발적인듯한 행동들, 직관이나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투자가치로 활용되고 있다. (그녀가 언제든지 자신의 '파트너' - 남편을 제외한 - 를 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를 사랑한 두 남자가 어이없이 죽는 것도...). 실용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그녀의 "전략"은 크게 성공을 거두고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다른 말로 하면, 경제성장의 원동력?) 이 된다. 

 

남편과의 삶을 언젠가 되찾겠다는 일념은 '단절'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배반당한다. 아니 배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의미의 상실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명증성을 가지고, 마리아가 그동안 믿었던 "결혼"은 거짓관계였으며 그 관계의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텅비어 버린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인 '결혼'은 자폭한다. 그것은 집의 폭발로 상징화된다.  

 

마리아 브라운이라는 한 여성의 "결혼"은 단수성과 동시에 복수성을 갖는 사건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결혼"이 직접적인 사회학적(여성학적) 의미로서의 남녀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에의 집착', '전통의 고수', '종전이전의 관계의 유지', 즉 '역사적 단절의 거부'라는 메타퍼의 차원으로 이행되면서 전후독일역사를 비유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사건'의 또 다른 함의는 자본주의적인 변형을 거쳐 '계약'의 형태를 갖게 된다는데 있다. 이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제안한 '내기'와 '계약'에서 근대자본주의적 함의를 읽어냈던 루카치의 분석을 참조할 수도 있으리라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마지막에 라디오축구중계는 1954년의 월드컵결승전이다. 여기서 프릿츠 발터는 팀의 주장으로 맹활약을 하면서 독일이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월드컵우승은 독일 역사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게 되는 '사건'이었다. 독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차대전의 치욕과 참회라는 족쇄를 풀고 새로운 독일로서 재탄생(세계에 인정받는)하는 기회로 독일국민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다.(며칠전에 프릿츠 발터가 세상을 떴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축구계에서 받은 충격은 심각한듯하다. 그가 한 축구인의 위상을 넘어 상징적인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종전이후의 독일국민들이 체감했던 '패배적이고 굴욕적인 삶의 남루함'이 컸던 만큼 이 사건은, 독일국민에게 국가적, 민족적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엄청난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이 68운동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파스빈더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 끝나는 시점에서 독일의 진정한 새출발이 가능해진다는 것, 즉 전전의 독일의 과거에 바탕을 둔 '계약'이 끝나면서 전후독일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계기를 극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의도에서 집의 폭발장면과 축구우승중계를 결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라면 제대로 된 논문을 하나 써야할지도 모른다. 

 

파스빈더는 37세에 죽었다. 텔레비젼은 칙칙소리를 내며 켜져 있었고 그는 침대에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마약과 알코홀, 그리고 과도한 흡연이 사망원인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숨겨진 또 하나의 사인으로, "사랑에의 갈증", "버림받을 것, 또는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불안"을 꼽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가 어렸을 때, 엄마가 그를 홀로 남겨두고 집을 나간 것, 그 상처를 그는 평생 회복하지 못했다. 일에 대한 몰두와 그일을 위해 늘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의 존재도 그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그의 "앞을 향한 도주"는 언제나 숨막히는 긴장의 소용돌이, 블랙홀이었고, 그로 인한 시간의 응축, 앞당김의 모험은 위기감을 느끼게 했으므로...사람들은 그 긴장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파스빈더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의 밀도는 두번 다시 체험할 수 없는 그런 것. 사람들은 오래 오래 기억을 함께 나눠먹으면서 파스빈더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나 보냈다. 

굥거니 탄핵은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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