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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낸시(애인)를 사냥칼로 난도질하며 살해한 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자기분열적 도착(倒錯)이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이것 또한 마약에 찌든 상태에서 저질렀겠지만 말이다.

 

선진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저항하며 살기란 힘든 형국이다. 그럼에도 '내 길을 가련다'고 하면 자신은 파국(자기학대 및 자기착취)을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 체제를 살면서, 냉혹한 자본에 대하여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한 줌의 도덕(아도르노의 저서)'도 안 되는 걸 갖고서 딸딸이 치는 격이다.

 

아도르노의 통찰마따나 그렇다..."잘못된 사회(체제)에서 옳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https://youtu.be/9w4xGFL9sVQ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도착(倒錯)이다.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의 단초를 제공한 프루동은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저서에서, "자본가가 얻는 부는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일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가는 그 부를 자기가 다 챙기고 노동자에게는 아주 조금만 나눠준다"고 일갈한다. 아울러, "따라서 자본가의 사유재산은 도둑질한 물건에 불과하다."고 쏘아붙였다. 르네상스 이후로 정립된 칼뱅의 직업소명설(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으면 그렇게 번 재산은 신성하다)의 원칙 이래로 이렇게 과격한 주장을 펼친 이는 없었다. 

 

프루동의 저서(재산이라 무엇인가?)가 그때(1840년) 당시 출판되었을 때, 파리의 주류 사회(18세기 말부터 상공업의 발달로 돈을 벌어들인 신흥 부르주아 계층, 이 계층은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중추적인 계층이었다)는 겉으론 무시하는 분위기였지만, 일부 부르주아의 계층은 프루동을 정신나간 놈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 당시 혁명(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의 실패를 맛본 노동자와 청년(물론, 랭보 또한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혁명 사상에 매료되어 1871년에 발생한 파리꼬뮌을 지지하며 파리로 입성했지만 개같은 좌절을 경험한 후에 어떠한 혁명도 그의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다)층을 중심으로 프루동의 지지자들이 적잖이 형성되고 있었다. 

 

프루동의 편린들은 지금에 와서 얼핏 살펴 보더라도, 공상적인 데가 있는 것은 사실(자본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소유-점유-자가 되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이다. 잇따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생했지만 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못 가진 자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프루동이 살 당시의 계급 투쟁은 귀족 대 평민(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서의 갈등을 빚었던 두 계급. 그 당시 평민을 더 분화해 보자면 부르주아, 농민)에서, 자본가 대 노동자로 분화되며 두 계급 사이의 전운이 서서히 감돌고 있을 때였다. 결국은 이런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닌 제정을 막 청산한 러시아(1917년)에서였다. 

 

내가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자본주의란 어떤 이름에 값할까 하는 문제이다. 미셸 푸코는 프랑스 대혁명을 고찰해 보면서,"사유와 정치적 분석에서는 아직도 왕의 목이 잘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즉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 군주제가 붕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표상은 군주제의 마력 - 권리와 폭력, 법과 위법성, 의지와 자유, 그리고 특히 국가와 주권의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 아래에 머물러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 자본주의 체제의 마력에 굴복당한 우리들의 자화상과도 같다.

 

현 시대는 금융자본주의의 이기성이 창궐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급은 단순하게 나뉘어질 수 있을지언정, 다양한 직업적 분화에 의한 계층은 점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겨나고, 자신의 조직(직업과 가정, 사회 집단)의 이기성에만 열을 올리고, 각자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조직끼리, 아님 같은 직종에서 분화된 직종끼리 첨예한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어떤 선한 의지로서 문제해결의 접급이 불가능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즉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자신의 조직과 자신을 위태롭게 할 때면 정치적 결단의 입장에 서길 언제나 강요받는 사회이다. 

 

이건 바로 우리의 현 사회의 직업군에서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할 때는 집단 행동도 불사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직업적 이익의 극대화만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보존할 수 있다는 데 기인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침범하는 다른 조직의 이익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존전략만이 절대의 원칙이며 소신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것이 개혁적이고 사회복지적인 조치이며, 개혁의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어떤 타당성을 갖는 사회 정의의 입법으로서의 준칙은 존재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악덕은 사실 이런 문제이다. 각자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만 편히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의 지표(권력, 돈, 지위, 명예)로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 진정 자신들의 삶 자체를 착취하지 않는다는 데서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각자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밥줄이 다른 직업군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은 꺼려하면서, 다른 이들의 삶은 어떠하든 상관없이 착취하려고만 드는 걸까? 정말이지 자본주의 사회란 이기적 욕망의 도착(倒錯)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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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서민
    2022.10.18 10:02
    베스트
    삭제된 댓글입니다.
  • 2022.10.18 10:11
    베스트

    개신교도 들어왔고 자본주의도 들어왔으나

    프로테스탄트 직업 윤리는 안들어 옴.

    그래서 개독이 되고 천민자본주의만 있음..

  • 형 글 직접쓰는거야? 아님 붙여넣기 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