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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1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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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371905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는 데뷔작으로 센세이션(난 이 영화를 보고서 쇼킹하여 쾌감이 절로 일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했다)을 일으켰던 장철수 감독의 프로필(네이버 영화정보) 이력을 보자니 이렇다..."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 2008년 한국영화 시나리오 마켓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최관영의 시나리오로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완성하고 제63회 칸영화제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하며 국내외 언론과 관객들에게 주목 받고 있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출신인 장철수 감독은 2000년 초반 일본으로 어학 연수를 갔다가 김기덕 감독의 〈섬〉을 보고 곧바로 귀국, 무작정 김기덕 감독을 찾아가 〈해안선〉의 연출부를 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의 조감독을 거친 후, 〈신부수업〉으로 상업영화의 감각을 익혔다. 그리고 첫 연출작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는 칸영화제가 열광한 잔혹스릴러를 완성한 것이다"

 

나도 장철수 감독처럼 찾아뵙고 그의 밑에서 영화를 배워보고 싶었다. 김기덕의 '섬'을 보고서 언젠가 김기덕 감독을 만나뵙고 싶었다. 외국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김기덕이 유독 한국 영화계에서 왕따 비슷하게 당하는 게 이상했다. 암틍 김기덕이 강원도 홍천의 어느 산골에 칩거하고 있을 때 찾아가려고 작정했다. 솔직히 김기덕 밑에서 영화를 같이 찍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왜냐하면 그때 나는 홍천 옆 횡성에 기거하고 있었기에.

 

아무튼 김기덕 감독은 저승 사람이라, 이젠 영영 뵐 수가 없다. 죽음도 먼 타국에서 맞이했다. 십오여 년 전 일이다. 영화 감독 중에 최초로 커밍아웃 했던 게이 감독은 김기덕 감독을 폄훼(여성을 잔인하게 다룬다는 이유였나 그랬다. 게다가, 이 감독은 사회현상에 대해 올바르게 글도 잘 쓰시는 양반인데, 김기덕 감독이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왈가불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이유라면 이 세상의 영화는 거진 쓰레기다)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성소수자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런 얘기를 사석(술자리)에서 만나 영화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우연찮게 김기덕 영화를 갖고서 왈가불가하게 되었던 것이다...아마도 내가 물었지 싶다. 김기덕의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그런 답변을 듣자니 난감했다...난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외국 영화제에서 김기덕의 작품이 인정을 받는다면 좋은 영화이지 않냐고 했더니만, 대뜸 그 게이 감독은 외국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는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아니라며, 동양적 오리엔탈리즘 어쩌꾸저쩌구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화들은 매번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참고로, 김기덕은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 베니스 및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작품상(황금사자상)을 받은 감독이다. 우리 나라 영화 역사상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초로 작품상을 받은 감독은 김기덕이 유일하다. 물론 그 이후에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말이다. 이런 족적을 남긴 감독을 홀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거다. 그놈의 시기심이 뭔지! 그 게이 감독은 네이버 블로그부터 터 알고 지냈다. 내 블로그에 링크된 음악들이 좋다면서 자신이 영화에 쓰일 음원(배경음악)을 찾게 되면 내 블로그에 그 음원이 있다면서 말이다. 아래의 글은 2002년도 안티조선 우리모두 내 커뮤니티(영화방)에 처음 썼던 글이다. 그 당시,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으로 조명받기 전이라...물론 전에 '플란다스의 🐕 '도 괜찮았지만 말이다...암튼 봉준호 감독은 나의 레이당망에 포착되지 않아서 언급이 안 되었다.

 

https://youtu.be/FKNXBHPkPf0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축하하며(2002년에 썼던 글인데, 2년 후에 김기덕은 그렇게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다)...영화에 대해 내 나름대로 씨불렁거려 보겠다.

 

우린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점(현재 영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영화의 재미적 요소는, 작금의 헐리우드가 추구하는 영화 스타일, - 골수 아트 영화매니아들은 제외하고서라도 - 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영화 자체의 다이내믹함이나 스펙타클, 보편적 휴머니즘의 구현, 호화로운 액션, 독특한 감각적 영상, SF 테크닉적 영상, 빠른 스토리 전개, 서사구조의 뚜렷함에서 오는 극적 긴장과 흥미진진한 반전에서 찾을 것이다.)이 있을 것이며, 그 취향도 각기 다를 것이다. 

 

왜냐면 인간 개개인의 취향과 관점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아마도 예술이 주관(예술이 공동 창작집단에 의해 창작되기보다는 한 개인의 역량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물론 영화는 스텝들이 참여하지만, 영화의 질감은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과 상상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미학 태도에 기인할 것이다. 

 

예술의 모든 형식은 미학이란 주제와 연결된다. 미학을 규정하는 학문 그 자체도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따라 미학자마다 다르게 표명된다. 물론 영화를 보고 받아들이는 수용자(일반 관객이나 전문적으로 영화를 비평하는 전문가 집단)들도 각기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의 미학(액션 스타일의 재미든, 철학적 주제가 녹아든 지적 재미든)적 관점(수용성)에 따라 자신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질점들이 다 다를 것이다. 이런 미적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접근해 보겠다. 

 

우선 본인이 좋은 영화라고 여기는 것은 강렬한 주제의식과 감독이 표현(연출)한 형식미가 나의 즉물(정서)적 감성에 얼마나 그 영화가 호소하고 있는 가에 따라 좋은 영화의 유무를 가린다. 

 

이런 주관적 수용의 과정은 극히 나의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지각 능력에 기대고 있지만, 일단 본인이 이건 틀림없이 좋은 영화였다고 느낀 영화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나의 정서를 건드렸다는 점이다. 

 

내가 경험한 예를 들자면,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었다. 그때가 본인이 군대에서 막 전역하고 1년 후였으니까 말이다. 전역하고 하릴없이 집구석에서 틀어박혀 빈둥대던 시절에 우연히 유선과 위성 방송에서, 나의 정서에 심대한 충격을 선사한 두 편의 영화을 보게 되었다.

 

솔직히 그 두 작품을 본지 2년 후에 알게 된 사실(본인이 영화에 몹시 관심이 많았던지라 영화 잡지나 영화개론서, 그리고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고서)이지만 영화사적으로 높이 칭송받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었다. 하나는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와 다른 한 작품은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였다. 

 

그 당시에 이 두 영화가 본인에게서만 느껴지는 독특한 정서적 충격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 이 두 작품에 대해 그리 관심(감독을 유심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 두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기에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중간에 보게 돼서 영화 타이틀도 알 수 없었기에)을 두지 않았다. 왜냐면 유년 시절부터 헐리우드 고전-40,50,60,70년대-에 친숙했던 본인으로선, 헐리우드 감독들과 배우들을 거진 다 꽤차고 있을 정도로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에 대해선 박식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말이다. 

 

그래서 난생 처음 보는 영화 스타일인지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봤다가 그만 정서적 충격에 휩싸여 그 두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한동한 정서적 감흥에 젖어 어쩔 줄 몰라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재차 유선방송(나중에 이 영화가 방송된 곳이 EBS 세계명화란 사실을 알았다. 유선방송이라서 그런지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해설자가 설명하는 부분은 보지 못했다. 아마 본 방송에서 보게 되었다면 잘 알 수 있었을 텐데)에서 재방송을 했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한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영화 속 이미지와 그 사제의 미묘한 울림에 또 흥분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레이션 독백을 통한 영화전개가 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겼기에 너무 좋았다. 

 

그리고 2년 후, 본인이 본 느낌 그대로 그 정서적 충격의 미묘한 파장을 잘 묘사해 준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은 바로 다름아닌 앙드레 바쟁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였다. 이 저서에서 앙드레 바쟁이 이 영화(시골 사제의 일기)에 대해 짤막하게 촌평한 부분이 있어서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며 읽어 내려갔다. 그때 본인은, "바로 이거야!", 하며 감탄을 자아내고 말았다. 그 부분을 한 번 옮겨보겠다. 

 

"시골 사제의 일기가 우리에게 걸작으로서 강한 인상을, 그것도 거의 육체적인 충격과 함께 감동을 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소박한 관계들은 물론 비평가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가장 높은 수준의 감수성을 유지하면서 결국 '지성'보다 ' 감성'을 자극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앙드레 바쟁 - 

 

나의 정서적 충격의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준 것이 바로 이거였다. 물론 본인이 위대한 영화 평론가(앙드레 바쟁은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를 필두로 해서 끌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등등-들에게 지대한 공헌을 한 장본인이면서 그때 당시 유명한 영화 비평의 권위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다.)의 언급에 기대어 정서적 충격의 온당함을 말하고자 함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헐리우드 영화류의 감식력이 남달리 자신 있었던 본인에게 이런 영화가 어떻게 커다란 정서적 충격을 안겨다 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사전에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본인에게 이런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가 몹시 난감했다는 심정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지금은 많은 위안이 된다. 홍상수 감독도 이 영화를 보고서 나름대로 영화를 다르게 생각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언급하는 것을 보고서 본인의 영화적 감식력이 그리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구나, 하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데서 중요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면 그 당시 본인의 깜냥에선 영화란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세세하게 영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내 마음 속에 싹트고 있었던 시점에서 그랬다. 즉 전문적인 식견이 없으면 영화를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영화잡지에서 영화평론가들이 하는 평론을 보면서 주눅이 들었던 나로서는 영화란 많이 볼수록 안목이 생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를 보고 느꼈던 것도 <시골 사제의 일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문제는 이 영화를 본인은 직접 위성방송인 NHK에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막도 없이 봤는데 내내 이 영화의 영상미에 매료되어 끝까지 다 보았다는 사실이다. 자막없이 내가 주로 봤던 영화는 헐리우드 클래식물 뿐이 없었는데, 그것도 일본 영화를 자세한 내용도 모르면서 그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는 건 그 영화가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그랬을 것이다. 즉 영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한 컷 한컷마다 독특한 영상미가 내 눈을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했다. 부초를 보면서 소폭의 수묵 채색화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고, 이미지로나마 그 영화속 내용의 어떤 정서적 스산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또 한가지 이 영화를 계속 보게 한 것은 스미꼬 역의 여배우(교 마치코)였다. 아주 내겐 독특한 마스크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보는 즉시 그 여배우에게 빨려들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에서 살해당한 무사의 아내로 출연한 배우란 걸 알았다. 

 

<라쇼몽>이 나와서 샛길로 새자면, 우리 영화가 세계 영화제를 목표로 할 때 이 영화를 전범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가 국제 무대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게 되자 그 이후로 미조구치 겐지도 후배(아키라)의 쾌거에 고무되어 미학적으로 괜찮은 영화(미조구치 겐지는 밑바닥 여성들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를 만들어 3년 연속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였다. 

 

라쇼몽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던 요소는 이렇다. 보편(약간 서구적인 구미가 당기는 주제, 반면 오즈의 영화는 대개 일본의 독특한 생활 정서에 기댄 영화를 만들었다.)적 주제의식(이 영화는 아쿠다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인 <라쇼몽>과 <숲 속에서>에서의 얘기를 엮어 각색한 영화인데, 강간 사건의 증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진실의 상대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이 영화와 더불어 보면 좋은 한국 영화가 바로 홍상수 영화의 "오 수정!"이다. 이 영화 또한 남녀 사이에서 경험한 일-사건-을 놓고 설전을 벌이면서 각기 다른 기억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 연인 사이였던 남녀가 서로 각기 다른 기억이 첨예하게 대립된다. 그건 바로 자신의 감정이 손상당하지 않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의 강렬함과 뛰어난 형식미(카메라의 복합적인 시선의 움직임과 명암처리, 그리고 역학적인 몽타주)가 결합되었기에 서구 평론가들의 눈에 일찍 띄게 된 것이다. 

 

반면 오즈의 영화가 구로자와나 미조구치에 비해 후대에 올수록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런 데(자신만의 독특한 촬영방식-다다미 샷과 기존의 영화문법에 어긋나는 촬영방식-과 정물화를 묘사하듯이 인간의 내면속 감성과 정서를 끄집어내는 연출 형식)에 기인할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영화적 감식력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트뤼포도 오즈의 영화를 처음에 혹평했다가 나중에 번복하는 실수 아닌 실수를 범하였다. 오히려 오즈의 진가를 알아보았던 감독들은 최소한의 카메라의 움직임과 미니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타르코프스키나 빔 벤더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이런 정서적 스타일을 지향하는 감독들은 로베르 브레송 또한 극도로 찬미해마지 않는다. 

 

그럼 우리의 영화 감독들은, 왜 지금까지 세계 무대에서 그렇다할 만한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꼭 영화가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아야지 좋은 영화라고 하는 공식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결코 영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대만이나 중국, 이란의 출신의 감독들은 유명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그들의 영화수준을 세계만방에 떨치는데, 우리 영화는 왜, 아직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그런 수상(작품상)이 없는 것일까? 물론 영화제를 주관하는 심사위원들의 취향이나 로비에 따라 수상이 결정되는 요소도 있지만 말이다.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자면 역시 강렬한 주제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형식미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문제점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물론 내가 그의 작품을 본 것은 '섬'과 '나쁜 남자'뿐이 없지만 섬을 보고 느낀 것은 도대체 주제의식이 모호하고 강렬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내용을 담는 영상미는 단연코 뛰어나고 탐미적인데 서사 구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형식미는 탁월하지만 그걸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내용(서사구조)이 탄탄하지 않고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센세이션한 소재를 발굴하고 특이한 영상은 잘 만들어내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다루고자 하는 소재의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는 데서 기인(자기가 추구하는 영상적 요소나 실제로 경험한 것에만 집착하다 보니)하는 것도 있다. 물론 그것은 감독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지만 말이다. 아마 김 기덕이 너무 화면 속 이미지에만 몰두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걸 이끌어갈 수 없는 그의 능력에서도 오는 것인지?

반면 이창동 감독은 서사구조는 탄탄하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영상)미는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이창동이 소설가 출신이라서 그런 지는 몰라도 그의 영화를 보면 서사구조의 탄탄함은 느껴지는데 영상의 형식미는 밋밋하다. 물론 이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일 지도 모른다. 허나 아직도 내가 느끼기에 이창동은 형식미를 더 세련되게 다듬거나 그만의 독특한 영상미학을 창출하지 않는 한 세계 무대에 나가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에서 색다른 영상 미학을 선보였지만 말이다. 좀 더 심혈을 귀울일 필요가 있다.

 

본인의 깜냥에서 보자면 이 두 가지(강렬한 주제의식과 형식미)가 그래도 잘 조화된 감독의 전범을 찾자면 유현목(오발탄이 대표작)과 임권택인데, 글쎄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임권택에 기대를 해보겠는데 아직도 그의 영화가 서구 평론가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 역시 소재의 선택적 상황의 빈곤함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영화가 서구에 많이 홍보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재나 주제가 빈곤해지기 때문인 걸까? 임권택이 형식(점차 아름다운 영상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농후하다.)에만 치우치다 보니 영화속 내용(취화선이나 성춘향전)이나 주제의식이 강렬하지 않다.

 

그리고 홍상수의 문제는 너무 자잘한 소재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좀 더 그 형식적 스타일- 내가 영화를 보고 처음 영화평이라고 끄적이며 썼던 것이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서 그 이전의 한국 감독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정서적 감흥을 느꼈다. 배우의 연기패턴도 뭐라고 할까, 배우들의 연기들이 영화 속 이미지에 잘 녹아들어서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영화속 대화나 장면 설정의 상황이 리얼하게 다가왔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홍상수의 연출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 우리 나라 영화들에 내가 식상한 것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속 그 역할에 녹아들지 않고 배우가 너무 겉도는 이미지로 다가왔기에 영화를 보더라도 그렇게 정서적 효과(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일생 생활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다. 즉 영화 속 상황 연출을 내가 완전히 긍정할 수 있었다.)를 느낄 수 없는 영화가 태반이었기에 말이다. 

 

근데, 홍상수 자신은 에릭 로메르를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좀 더 그 형식적 스타일(상황적 연출의 디테일함은 가히 비범하다.)에서 탈피해, 강렬한 서사 구조 속에서 과감한 주제 의식을 건드렸으면 좋겠다. 물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어쩜 작가로서의 독특한 작가적 위치의 위상을 독점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홍상수에게서 바라는 것은 이제 그런 의식적 소재를 좀더 차원 높은(굵은 서사적 내용) 주제의식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너무 오밀조밀한 것만 추구하다 보니, 큰 곁가지가 없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처럼 강렬한 인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정서적 소격 효과는 대단한데 항상 거기서 맴돌 뿐이다.

 

<<생활의 발견>>이나 <<오! 수정>>에서도 그 정서적 우울함, 침울함, 유쾌함(스크린-속-실생활의 디테일한 심리적*행동적 연출력)이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정밀(극적이고 격렬한 표현 양식은 없을지언정, 정서적이고 정적인 영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어라고 딱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묘한 정서에 젖게 만든다. 물론 영상의 속도에서 오는 지루한 감은 많지만 흔해빠진 일상적인 상황을 정확하고 엄밀한 화면 구도 속에 치밀한 미장센 효과로 인물들의 연기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도구 하나하나에도 매우 세심하게 귀기울이는 것 또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떤 주제 의식의 명료한 서사적 스토리로 연결이 안 되었을 때는 일반 영화 관객이 바라보았을 때는 무미건조한 영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태반이다. 물론 영화-속-형식미에서의 홍상수의 연출력은 대단히 뛰어나며, 무엇보다 배우들의 그 상황적 연기의 자연스러움을 누구보다 확실히 캐치해내는 데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감각을 보여준다는 데서 평론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영화로 받아들여지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홍상수 영화의 형식적 미학(심리적*정서적 효과의 극대화를 추구)은 벌써 몇몇 서구 감독(로베르 브레송,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들이 추구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뿐이 아닌가? 그래서 외국의 대부분의 평론가들 또한 로베르 브레송과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극찬한다. "나는 연극에서 행해지듯이 결코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 로베르 브레송의 이 말은 홍상수가 당당히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말이다. 브레송의 영화들이 거의 의식적인 반복, 일상사, 재연된 대결(오! 수정)들, 같은 장소로의 되돌아옴(강원도의 힘)을 정물화처럼 묘사한다.  

홍상수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위의 브레송의 영화적 특질을 자신의 영화적 소재로 설정하여 그것에 천착하는 행태를 띤다. 하물며, 홍상수 감독은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고 영화를 다르게 생각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더 말해서 무엇하겠냐마는...-을 과감히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

 

역시 문제는 그런 것을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스타일에 맞게 최대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감독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건만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리고 2년 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은 한마디로 용두사미가 된 작품이다. 주제도 좋고 형식미도 괜찮았는데 자연스런 서사구조의 난맥(난 마지막의 이병헌의 고뇌와 자살 시퀀스를 보고 이 영화는 여기서 죽고 말았다)상을 드러내는 바람에 완전히 이 영화를 망쳤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한 명의 감독을 말하자면 배용균인데 이 감독은 너무 작가적 자의식이 강한 것이 탈이다. 조금도 주류 영화계와 타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신이 직접 다해내겠다는 독선이 그의 영화적 표현의 풍부함을 스스로 사장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지금 배용균은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라쇼몽]처럼 서구에 어필했던 감독의 영화를 찾자면, 첸 카이거의 <패왕별회>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들 수 있겠다. 이 두 영화는 완벽한 주제의식과 형식미가 결합되어 두 영화 모두 세계 영화제에서 대상(깐느와 베니스)을 받은 작품이다. 

 

원래의 오즈의 이야기로 되돌아와서,<부초>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시골 사제의 일기>처럼 내가 느꼈던 정서적 감각의 느낌이 정확한 걸까 하는 의심을 또 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중에 도서관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인생>이라는 전기물 속에 내가 봤던 <부초> 스틸 사진을 접하고서 이 사람의 작품도 대단한 것이었구나 하게 되었다. 어쩜 나에겐 이런 후검증을 통해 내가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보았던 영화의 느낌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화보기란 자신이 수용하는 감각적 능력을 믿고 보게 되면 그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아니면 형편없는 영화인지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수 많은 영화보기를 통해 영화 보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그토록 나의 영화적 감수성의 판단의 미혹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이 바로 이 두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를 접하면서 내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미학을 정립하게 되었다. 평론가가 뭐라고 떠들든, 내가 받아들이는 주관적 정서적 감흥이 명확하지 않다면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어려운 영화는 두렵기 마찬가질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좋은 영화 기준점은 평론가가 뭐라고 해도 내 자신이 그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주관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보통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과 전문적으로 영화에 종사하는 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괜찮다고 여기는 영화들은 공통일반처럼 대다수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10년마다 세계 10대 영화라면서 sight & sound 에서 발표하는 영화들을 보면 평론가들도 높게 평가하는 작품들이 뽑히는 걸 보면 일일이 그 작품의 세세한 것을 비평하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될 수는 있을지언정, 어떤 공통감각(저 영화가 좋은 영화다라는 사실은 역사적 상황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해석되어지고, 평론가마다 직감적으로 느끼는 질점들이 디테일하게 다른 것은 있다. 하지만 한 영화에 대해 저마다 다르게 진가를 내린다고 해서 일반공통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은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모든 예술매체의 미학을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하는 예술미학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공통감각까지 부정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공통감각이란 자신이 영화에 대한 선지식이 없이도 그 전대나 후대의 영화 평자들과 똑같이 정서적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영화적 감식력은 누구나 다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좋은 영화란 무엇이고 영화의 순기능은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간략히 써보겠다. 

 

지성적 추구 
행동적 추구 
정서적 추구 

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된 영화가 난 좋은 영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질 들뢰즈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화의 순기능은 감성을 날카롭게 갈고 닦아주는데 있다. 그리고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게 하는 것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단지 본다는 행위(구경)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기능으로서의 정서적 감흥을 느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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