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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09.0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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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아마도 많은 사람이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특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는 아마 온 국민이 다 아는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이다.

서얼 차별의 문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주인공의 열전과 헌신 등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의 이미지다.

문득, 나에게 질문을 한다.

"과연 나는 이 소설을 지은 허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허균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온전히 홍길동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홍길동전에서 허균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선 최고의 불온한 자유주의자:

조선시대 역사를 회고해 보면 많은 반역 사건이 있었다.

그중에는 권력 찬탈을 위해서 일어난 반역 사건도 많지만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꾸다 반역의 죄를 뒤집어쓴 사람도 다수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앞서 이괄의 난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광조의 난을 들 수 있다.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 개혁을 꿈꾸다 반대파에 의해 반역죄를 뒤집어쓴 많은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대부분 사면 복권되고 그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균이다.

그는 조선시대에서는 사면복권 되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喪禮)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외람되이 작위를 차지하여 녹을 훔쳤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의 반교문

 

허균과 조광조:

 

흔히 조선시대의 최대의 개혁 사건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조광조를 떠올린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태생적으로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박원종, 성희안을 중심으로 한 반정 1등 공신 세력이 이미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 이후 초기에는 왕은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중종의 관심은 왕권의 회복과 나아가 앞선 시대처럼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종에게는 그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도 그 세력이 역사적이나 사상적으로 정통성이나 명분을 가져야만 했다. 이러한 중종의 요구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 조광조를 필두로 젊은 사림세력이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젊은 사람 세력은 무엇보다 당시 반정공신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난하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도덕정치를 내세우며 조선사회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조광조가 꿈꾸는 개혁은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온순한 의미의 사회개혁이었다. 즉 조광조는 기존의 조선사회의 근간을 부정하지 않고 그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따라서 조광조의 개혁이 훈구파의 반발로 무산이 되었지만 조선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온건한 개혁이었다. 이런 이유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재평가되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균의 경우는 조광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사회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조선사회, 혹은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체제 전복을 꿈꾸는 악질 반역세력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허균을 패륜아, 혹은 심지어 괴물이라고 표현하면서 그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조선사회가 허용하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개혁을 주창하다가 사라진 조선시대 최고의 불온한 자유주의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조선이 막을 내리는 그날까지 사면 복권되지 못하고 영원한 반역자의 굴레를 벗을 수 없었다. 

아마 허균은 조선시대 최초의 민주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의 사상, 호민론과 유지론

그는 유지론에서 조선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적이 고착화된 신분제도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서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던 수많은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는 조선 체제는 이미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하늘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지론을 통해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모순을 혁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수 있을 때 참다운 조선사회의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관점으로 본다면 만민평등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호민론에서는 좀 더 과격한 주장을 한다. 

호미론의 첫 구절은 "天下之所畏者唯民而已"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를 현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조선시대 중기 이미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주권 재민"의 사상을 주창한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 헌법 1조 "대한민국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또한 그는 "국민을 항만, 원민, 호민으로 분류하여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 호민이 등장하여 항만과 원민을 거느리고 혁명에 성공을 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라며 사회개혁을 넘어선 사회혁명의 당위성과 방법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호민론에서 주장한 주권 재민 사상과 유지론에서 주장한 만민평등사상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조선시대에 심고자 했던 그의 사상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논이고 이는 조선시대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허균은 진실로 시대를 앞선 간 자유주의자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허균의 사회혁명 방법론 = 홍길동전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허균의 사상이 집대성되어 현실화된 것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아마도 홍길동전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 숨긴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홍길동의 내용을 허균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재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란 이후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당파싸움과 부패로 얼룩진 지도층의 수탈에 국민은 더욱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국민의 불만과 원성이 하늘에 닿아있을 때 홀연히 홍길동이라는 호민이 등장을 한다. 그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원민과 항만을 이끌고 지도층에 강력히 대항한다. 이윽고 그는 그를 따르는 항만과 원민을 이끌고 만민이 평등한 이상향인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필자의 요약

 

어떠한가? 

우리가 그냥 소설로만 알고 있었던 홍길동전이 사회혁명의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쯤 되면 의심이 하나 든다. 왜 허균은 홍길동전을 썼을까? 

단순히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렇게 위험한 소설을 쓸 유인이 있었을까?

 

물론 홍길동전의 정확한 작성 연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홍길동전의 대상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허균을 극악무도한 반역죄로 사라지게 만들었던 단초가 되는 사건 이른바 "칠서 사건(1613년)"이다. 

 

질서 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칠서는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洋甲),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병사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생산 군(商山君) 밖 충간의 서자인 박 시인(朴致仁)·박치의(朴致毅), 그리고 후 홍인(許弘仁)이다. 이들은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소양강 위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곳에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함께 지냈는데,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하여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렸다.

이들은 광해군 즉위초에 서자도 관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명 상소했다가 허락받지 못했다. 이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나무꾼, 소금장수, 노비추쇄인 등을 모아 화적질을 하며 곡식을 모았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새재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했다가 이듬해 모두 포도청에 잡혔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와 영창대군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칠서가 잡히자 대북파인 이이첨(李爾瞻)은 칠서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국구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고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적질을 저지른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칠서의 국문을 맡고 있던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은 이이첨의 명을 받고, 박응서에게 시키는 대로 자백하면 사형을 면해주겠다고 설득했다. 박응서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 자백함으로써, 결국 소북파가 숙청당하는 계축옥사를 야기해 김제남과 그의 아들들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이와 더불어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위시한 서인과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이후 정권은 대북파가 독점했다

<다음 백과> 칠서 사건

 

난을 주동한 일곱 명의 서자 중 3인이 평소 허균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난의 배후세력으로 허균이 주목을 받게 되고 결국 국문 끝에 사형에 처해진다. 

유심히 살펴보면 칠서의 난과 홍길동전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첫째, 주도자가 서자라는 점과 둘째, 그들의 주 활동 무대가 문경새재라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홍길동전이 바로 칠서의 난과 무관하지 않다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홍길동전의 정확한 작성 연대를 모르기 때문에 두 가지 주장을 할 수 있다. 

첫째, 홍길동전은 칠서의 난의 시나리오로 허균이 작성을 한 것이다 하는 주장이 가능하다.

둘째, 칠서의 난이 실패한 것을 슬퍼한 허균이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홍길동전을 작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 칠서의 난으로 허균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허균이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시나리오로 홍길동전을 저술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는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에 침착되어 있는 조선시대를 개혁하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방안에 앉아 몽상에 잠기는 사상가가 아닌 실천하고자 했던 개혁주의자 혹은 혁명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담긴 것이 홍길동전은 아닐까?

오늘도 비딱한 사람이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아니면 어때? 흥미로우면 된 거지.

과연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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