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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Story
2022.12.0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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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tssa.co.kr/1640803

안녕하세요, 에스프리입니다.

 

앞서 예고한대로 세계 각 나라의 이름의 어원과 현재 표기명 / 원어명 / 제안 표기명을 작성해보겠습니다.

 

각 대륙 별로 권역을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시아: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2) 유럽: 서유럽, 중부유럽, 북유럽, 남유럽, 동유럽
(3) 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4)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남아메리카
(5) 오세아니아: 오스트랄라시아,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번외: 미승인국가

 

이번 글에서는 동아프리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표기명 / 원어명 / 제안 표기명입니다.

 

동아프리카.png

 

1)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 / ኢትዮጵያ (Ityop̣p̣ya), የኢትዮጵያ ፌዴራላዊ ዴሞክራሲያዊ ሪፐብሊክ (Ye-Ītyōṗṗyā Fēdēralawī Dēmokirasīyawī Rīpebilīk) (암하라어) / 이티오피아, 이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

에티오피아.png

 

--> '에티오피아'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티오피아 (Αἰθιοπία (Aithiopíā))'에서 온 표현으로, '불탄 얼굴의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일강 상류 지역에 흑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을 통틀어 '아이티오피아'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안드로메다 (Ἀνδρομέδη (Andromeda)) 공주가 이 나라의 공주였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초기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화석 ('루시') 그리고 현생 인류의 아종이었던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 (Homo sapiens idaltu)의 화석이 발견된, 인류의 발상지 중 한 곳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인류 최초로 수수를 재배한 지역이기도 하며, 고대에는 고대 이집트와 몰약 (myrrh), 상아, 금 등을 교역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최초로 명확하게 실체가 규명된 왕국은 1세기 경 등장한 악숨 왕국 (መንግሥተ አክሱም (Mängəśtä ʾäksum))입니다. 악숨 왕국은 333년에 기독교를 받아 들였고, 로마 제국보다도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합니다. 악숨 왕국은 홍해 무역로를 장악하여 번성하였지만,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자 해상 무역 이권을 상실하여 10세기 중엽 멸망합니다.

 

악숨 왕국이 쇠락하자 이 일대는 혼란에 빠지지만, 자그웨 왕조 (Zagwe dynasty)가 세워집니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전쟁을 치르던 유럽 국가들과 접촉하며, 같이 기독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십자군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이후 예쿠노 암라크 (ይኩኖ አምላክ (Yekuno Amlak))가 1270년 암하라인 (አማራ (Āmara)) 중심의 솔로몬 왕조 (ሰሎሞናዊው ሥርወ መንግሥት (Sälomonawīwi širiwä menigišiti))를 세워 자그웨 왕조를 전복합니다. 솔로몬 왕조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인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 (שְׁלֹמֹה‎ (Šlōmō))과 시바의 여왕 (מַלְכַּת שְׁבָא‎ (Malkaṯ Šəḇāʾ))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세 (ምኒልክ (Menelik))를 전설적인 시조로 주장하였고 에티오피아 제국의 기원입니다. 솔로몬 왕조는 주변 지역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교구제를 강화하여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아달 술탄국 (سلطنة العدلية (Saltanat aleadlia))와의 전쟁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국권을 회복하지만 오로모인 (Oromoo)의 침입으로 많은 영토를 잃습니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짧은 기간 황제들이 교체되는 등 혼란을 겪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오랜 혼란기를 종식시킨 것은 메넬리크 2세 (ዳግማዊ ምኒልክ (dagmawi mənilək))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과 정복 활동을 통해 에티오피아를 통일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에티오피아의 수도가 되는 아디스아바바 (አዲስ አበባ (addis ababa))를 건설합니다. 또한 노예 제도를 폐지하며, 프랑스, 러시아 등의 지원을 받아 근대화를 추진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이탈리아가 침략하지만, 메넬리크 2세는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이탈리아를 축출합니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오랜 기간 독립을 유지합니다. 이후 1930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ቀዳማዊ ኀይለ ሥላሴ (Qädamawi Häylä Səllasé))가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며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가 독가스까지 동원하여 에티오피아 제국을 강점합니다. 에티오피아는 내부 저항 세력의 호응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를 축출하고,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에리트레아를 합병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전쟁에 황실 친위대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교전마다 승리하는 맹활약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경제 개발에는 실패하였고, 대기근이 발생하자 구호 물자를 암하라인 위주로만 분배하여 오로모인, 소말리인 (Somalis), 티그라이인 (Tigrayans)들의 원한을 삽니다.

 

민심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떠나자, 황제가 아끼던 장교였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መንግስቱ ኃይለ ማርያም (Mängəśtu Ḫaylä Maryam))은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국을 폐지하고 군정 (ደርግ(Derg))을 수립합니다.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정책을 펴서 토지를 국유화하고 반대파를 숙청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가뭄, 종교 및 부족간 분쟁, 에리트레아의 독립 운동, 소말리아와의 전쟁 (오가덴 전쟁 (Ogaden War)), 에이즈 환자 폭증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지원하던 소련이 지원을 중단하자 멜레스 제나위 (መለስ ዜናዊ (Mälläs Zenawi))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이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축출하고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멜레스 제나위는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독재자가 되어 2012년까지 통치했고, 그의 통치기에 에리트레아는 기어이 독립하고, 에티오피아는 기근과 내전, 에리트레아와의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최근에는 2018년 새롭게 총리가 된 아비 아머드 알리 (አቢይ አህመድ አሊ (Abiy Ahmed Ali))는 에리트레아와의 전쟁을 종결하였습니다. 그러나 2020년 티그라이 지역에서 총선 연기에 반발하여 반군이 봉기하여 현재까지도 내전이 진행 중입니다.

 

암하라어로는 '이티오피아'에 가깝기 때문에, '이티오피아' 내지는 '이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2)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국 / ኤርትራ (ʾErtrā), ሃገረ ኤርትራ (Hagere Ertra) (티그리냐어); إرتريا (Iritrīyā), دولة إرتريا (Dawlat Iritriyá) (아랍어) / 에르트라, 에르트라국

에리트레아.png

 

--> '에리트레아'는 고대 그리스어 '에리트라 탈라사 (Ἐρυθρὰ Θάλασσα (Erythra Thalassa))'에서 온 표현으로, '홍해 (Red Sea)'라는 뜻입니다. '에리트레아'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890년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 (Colonia Eritrea)가 형성될 때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고대 악숨 왕국 (መንግሥተ አክሱም (Mängəśtä ʾäksum))의 주요 항구들이 있던 지역입니다. 악숨 왕국은 333년에 기독교를 받아 들였고, 로마 제국보다도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합니다. 악숨 왕국은 홍해 무역로를 장악하여 번성하였지만,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자 해상 무역 이권을 상실하여 10세기 중엽 멸망합니다. 악숨 왕국이 쇠락한 뒤에는 기독교 왕국인 메드리 바흐리 왕국 (ምድሪ ባሕሪ (Medri Bahri))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 에티오피아 제국,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의 통치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지만, 최종적으로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952년 에티오피아 제국에 병합됩니다. 이후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 (ህዝባዊ ግንባር ሓርነት ኤርትራ (Hizibawī Ginibari Harineti Ēritira); 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EPLF))를 중심으로 에티오피아에 맞서 독립 전쟁을 이어 나갑니다. 이후 에티오피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에리트레아는 1993년 독립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EPLF의 사무총장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ኢሳይያስ ኣፍወርቂ (Isaias Afwerki))가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94년 EPLF를 개편한 민주 정의 인민 전선 (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 PFDJ)를 유일 합법 정당으로 만들고 현재까지 독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에리트레아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언론과 종교의 자유가 없으며, 국민들이 16-18세가 되면 남녀 모두 징집되어 10년 이상 복무해야 하는 최악의 독재 국가입니다.

 

에리트레아 현지어인 티그리냐어로는 '에르트라'에 가깝기 때문에, '에르트라' 내지는 '에르트라국'으로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3) 소말리아: 소말리아, 소말리아 연방 공화국 / Soomaaliya, Jamhuuriyadda Federaalka Soomaaliya (소말리어); الصومال (as-Sūmāl), جمهورية الصومال الفيدرالية (Jumhūriyah as-Sūmāl al-Fīdirāliyah) (아랍어) / 소말리야, 소말리야 연방 공화국

소말리아.png

 

--> '소말리아'는 이 나라의 주류 민족인 소말리인 (Soomaali) 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소말리어로 '소말리인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소말리인의 공동 조상은 사말레 (Samaale)라는 인물로, 그의 이름이 소말리인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설로는 소말리어로 '가다'를 뜻하는 'soo'와 '우유를 짜다'를 뜻하는 'maal'이 합쳐진 말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소말리인들의 유목 생활을 반영합니다.

 

이 지역에는 고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상업적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그리스와 활발하게 교역하며 번영했습니다. 소말리인들은 낙타를 길들이고, 베덴 (beden)이라는 빠른 선박을 개발하여 무역에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소말리아는 이슬람의 발상지 아라비아와 가깝기 때문에, 교역로를 타고 이슬람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아달 술탄국 (سلطنة العدلية (Saltanat Aleadlia)), 아주란 술탄국 (دولة الأجورانية (Dawladdii Ajuuraan)) 등 여러 이슬람계 국가들이 있었고, 무역로의 중심으로 번영했습니다. 이후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سلطنة مسقط وعمان (Salṭanat Masqaṭ wa-‘Umān))이 소말리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연안을 장악하여 번영합니다. 다만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이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지고 멸망하자, 유럽 열강들이 침투합니다. 이후 베를린 회담 (Berlin Konferenz)에서 소말리아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으며, 각각 북부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British Somaliland)와 남부의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Somalia Italiana)로 불리우게 됩니다. 이탈리아는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기도 하나, 결국 영국에 패배하여 소말리아 전역은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소말리아는 196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지역이 통합하여 독립합니다. 아덴 압둘라 오스만 다르 (Aadan Cabdulle Cismaan Daar)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뒤이어 총리였던 압디라시드 알리 샤르마르케 (Abdirashid Ali Shermarke)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여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습니다. 그러나 압디라시드 아리 샤르마르케 대통령은 1969년 소말리아 북부의 마을을 방문하다가 경호원에게 암살당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시아드 바레 (Siyaad Barre)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시아드 바레는 친미적인 행보를 보이며 소말리아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인프라도 확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접국인 에티오피아가 1974년 쿠데타로 공산화되자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합병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는 오가덴 전쟁 (Ogaden War)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여 경제 상황이 악화됩니다. 이 와중에 시아드 바레는 자신의 씨족에게만 혜택을 주고 부정축재하여 결국 소말리아의 다른 씨족들과 정치 집단들이 내전을 일으켜 1991년 시아드 바레를 축출합니다.

 

시아드 바레가 축출된 뒤 북부의 옛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소말릴란드 공화국 (Jamhuuriyadda Soomaaliland)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독립합니다 (현재까지는 미승인국). 남부의 옛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지역은 시아드 바레를 축출했던 여러 정치 집단들이 충돌하여 내전이 재개됩니다. 이러한 내전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경제 기반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를 보다 못한 유엔군이 1992년부터 개입하지만 내전을 종결시키지 못하고 1995년 철수합니다. 이후 오랜 내전 끝에 2004년 과도 연방 정부 (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가 설립되지만, 내전의 혼란상을 틈타 세력을 키운 이슬람 법정 연합 (Islamic Courts Union, ICU)가 과도 연방 정부와 대립합니다. 과도 연방 정부는 에티오피아를 위시로 한 아프리카 연합의 도움을 받아 이슬람 법정 연합을 무너뜨리지만, 알 샤바브 (Xarakada Mujaahidiinta al-Shabaab)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조직되어 남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알 샤바브는 외국인 납치 등의 병크를 저질러, 과도 연방 정부는 아프리카 연합의 도움을 받아 알 샤바브를 많은 지역에서 몰아냅니다. 알 샤바브를 어느 정도 몰아낸 뒤 2012년에는 정식 정부 체계로 개편하였고, 간간이 알 샤바브에 의한 테러는 일어나고 있지만 예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안정된 상태입니다.

 

소말리어로는 '소말리야'에 가깝기 때문에 '소말리야' 내지는 '소말리야 연방 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4) 지부티: 지부티, 지부티 공화국 / جيبوتي (Jībūtī), جمهورية جيبوتي (Jumhūrīyah Jībūtī) (아랍어); Djibouti, République de Djibouti (프랑스어) / 지부티, 지부티 공화국

지부티.png

 

--> '지부티'는 이 나라의 이름이자 수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부티'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우선 아파르어 (Afar)로 '판 (plate)'을 의미하는 'gabouti'에서 유래했다는 설인데, 이 지역의 평평한 지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지', '고원'을 의미하는 'gabood'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고대부터 소말리인 (Somali)과 아파르인 (Afar)이 거주했고,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보고 있어 일찍이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지역에는 아달 술탄국 (Adal Sultanate), 이파트 술탄국 (Ifat Sultanate)가 있었고, 16세기에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 속주 (Mısır Eyaleti)의 일부가 됩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프랑스가 침투하면서 프랑스령 소말릴란드 (Côte française des Somalis)라는 이름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지부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7년 프랑스령 아파르족-이사족 자치령 (Territoire français des Afars et des Issas)이 되었다가 1977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독립 이후 이사족 출신 하산 굴레드 압티돈 (حسن جوليد أبتيدون (Hassan Gouled Aptidon))이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하산 굴레드 압티돈은 1981년 그의 정당이 진보를 위한 인민 집회 (Rassemblement populaire pour le Progrès, RPP)를 유일 합법 정당으로 선언하여 일당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1991년에는 아파르족이 차별에 반발하여 지부티 내전을 일으켰고,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정부군이 우세를 점해 1994년 평화 협정을 통해 내전을 종결하였습니다. 하산 굴레드 압티돈은 1999년까지 지부티를 통치하였고, 이후에는 그의 조카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 (إسماعيل عمر جليه (Ismaïl Omar Guelleh))가 대통령이 되어 현재까지도 대통령입니다. 지부티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프랑스군, 미군, 중국군 등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들 주둔군과 관련된 파생 산업과 수출입 산업이 주 수입원입니다.

 

 

5) 남수단: 남수단, 남수단 공화국 / South Sudan, Republic of South Sudan (영어) / 남수단, 남수단 공화국

남수단.png

 

--> 남수단은 근대 이전에는 나일로트계 유목민들이 걸어다니며 유목을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근대 이후 이집트가 수단까지 영역을 확장하자 남수단 지역도 이집트의 영향 하에 들어오게 됩니다. 남수단은 수단이 1956년 영국과 이집트의 협상으로 독립할 때 수단과 묶여서 독립하게 되지만, 영국이 식민 통치 시절 심어둔 남북 갈등 (북부 - 아랍계 무슬림, 경제적 우월 / 남부 - 흑인 기독교인, 자원은 많으나 경제적 빈곤)이 독립하자마자 폭발하여 내전이 터집니다.

 

결국 2005년 남수단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2011년 독립하였습니다. '남수단'은 이름처럼 '수단의 남부'여서 '남수단'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러 부족들이 저마다 다른 이름을 내세웠지만, 모든 부족이 동의할만한 명칭인 '남수단 공화국'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남수단 초대 대통령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Salva Kiir Mayardit)가 권력 남용으로 독재를 시작하자, 리에크 마차르 (Riek Machar) 부통령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추구하는 반군들이 모여 남수단 내전이 일어납니다. 남수단 내전은 2020년 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참여하는 과도 통일 정부가 출범되면서 종결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남수단은 현재 동아프리카 공동체 (East African Community) 회원국 중 하나입니다.

 

 

6) 케냐: 케냐, 케냐 공화국 / Kenya, Jamhuri ya Kenya (스와힐리어); Kenya, Republic of Kenya (영어) / 케냐, 케냐 공화국

케냐.png

 

--> '케냐'는 이 나라에 있는 '케냐 산 (Mount Kenya)'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케냐 산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 지역 원주민 언어인 키쿠유어 (Kikuyu), 엠부어 (Embu), 캄바어 (Kamba)로 '신의 휴식처'라는 뜻의 Kirinyaga, Kirenyaa, Kiinyaa와 관련 있을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이 지역을 탐험한 독일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크라프 (Johann Ludwig Krapf)는 캄바어 버전으로 듣고 Kenia 내지는 Kegnia로 기록하였고, 이것이 Kenya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 지역은 초기 인류의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능력 있는 사람', 최초의 사람속 (Homo))의 화석이 발견된, 인류의 발상지 중 한 곳입니다. 현생 인류로서는 코이산족 (Khoisan)이 거주했으나,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의 남하로 밀려납니다. 또한 나일로트계 민족들 (Nilotic people)도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로 남하하는데 이들은 마사이족 (Maasai)의 조상이 됩니다. 케냐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남부의 인도양 연안은 고대부터 인도양 무역로로 활용되어 인도 및 아랍 지역과 금, 상아, 노예 무역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투어 (Bantu) 바탕에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인 스와힐리어 (Swahili)가 교역 언어로서 발전합니다. 

 

이후 15세기에 이르러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를 비롯한 포르투갈인들이 케냐에 도달하였고, 이들은 해안 지대에 거점을 만들어 인도와의 무역에 활용하였습니다.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سلطنة مسقط وعمان (Salṭanat Masqaṭ wa-‘Umān))이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고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은 노예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19세기에는 노예를 활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이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영국이 침투하여 동아프리카 보호령 (East Africa Protectorate)을 설립합니다. 이후 1920년에 동아프리카 보호령은 케냐 식민지 (Kenya Colony)로 전환됩니다.

 

케냐는 오랜 독립 운동 끝에 1963년 '케냐 자치령'으로 독립하였고, 1964년에는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독립 운동가 조모 케냐타 (Jomo Kenyatta)가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조모 케냐타는 본인의 정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 (Kenya African National Union, KANU)을 중심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1969년에는 야당인 케냐 인민 연합 (Kenya People's Union, KPU)을 금지시켜 케냐를 일당 독재 국가로 만듭니다. 다만 조모 케냐타가 집권할 때는 케냐의 경제 성장이 건실한 편이었습니다. 조모 케냐타가 1978년 사망한 뒤에는 부통령인 다니엘 모이 (Daniel Moi)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모이는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방식으로 케냐를 통치해서 케냐 경제를 나락으로 빠트립니다. 다니엘 모이는 외국에서 빌려온 돈도 개인 재산으로 빼돌렸으며, 정적들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국내외의 압박으로 다당제를 도입하였고, 그럼에도 다니엘 모이는 야권 분열을 통해 2002년까지 집권하다 물러납니다. 이후 케냐는 민주화되었지만 부족간 갈등이 존재하며, 부정 선거 시비가 심심찮게 있습니다. 그나마 내전과 쿠데타는 없는게 주변 국가들보다는 나은 점입니다. 

 

 

7) 우간다: 우간다, 우간다 공화국 / Uganda, Jamhuri ya Uganda (스와힐리어); Uganda, Republic of Uganda (영어) / 우간다, 우간다 공화국

우간다.png

 

--> '우간다'는 이 나라의 주류 민족인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의 간다인 (Baganda)이 세운 나라인 '간다국 (Buganda)'에서 온 말입니다. '우간다'는 'Buganda'의 스와힐리어 (Swahili) 표현이라고 합니다. 간다인의 언어인 간다어로, 'Ganda'라는 말 앞에 'Ba'가 붙으면 '간다인 (Baganda)', 'Bu'가 붙으면 '간다국 (Buganda)', 'Lu'가 붙으면 '간다어 (Luganda)'가 된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는 반투계 민족이 처음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투계 민족의 일파인 간다인들은 13세기에 간다국을 세웠고, 18세기에서 19세기 이르는 시기 통일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후 19세기 중엽 아랍인들이 교역을 위해 이주했고, 뒤이어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 나선 영국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이 도래합니다. 간다국의 왕 (카바카 (Kabaka)라는 칭호를 씁니다) 무테사 1세 (Mutesa I)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허용했고, 간다국에서는 토착 종교, 가톨릭, 성공회, 이슬람이 경쟁합니다. 무테사 1세를 뒤이어 즉위한 음왕가 2세 (Mwanga II)는 무슬림들의 쿠데타로 쫓겨났다가 가톨릭-성공회 세력과 대영제국 동아프리카 회사 (Imperial British East Africa Company)의 도움으로 복위하였습니다. 이후 간다국은 1894년 영국의 보호령인 우간다 보호령 (Protectorate of Uganda) 소속이 되며, 간다국의 실체는 인정됩니다. 

 

우간다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곧 공화국으로 체제를 변경하였는데, 공화국 내 간다국을 비롯한 지역 왕국들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간다국의 왕 무테사 2세 (Mutesa II)가 초대 대통령, 베네딕토 키와누카 (Benedicto Kiwanuka)가 초대 총리가 되고, 곧 밀턴 오보테 (Milton Obote)가 총리가 됩니다. 밀턴 오보테는 1966년 쿠데타를 일으켜 무테사 2세를 축출하고, 1967년 새 헌법을 공포해 대통령이 된 뒤 간다국을 비롯한 모든 지역 왕국들을 폐지하였습니다. 하지만 1971년 이디 아민 (Idi Amin)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1973년 민정으로 이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디 아민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폭압적인 통치를 시행합니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 겸 육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 겸 공군 참모총장 (우간다는 내륙국이라 해군은 없습니다)이 되었으며 의회를 없앴습니다. 또한 지식인, 장교, 법관들과 주민들을 기분에 따라 고문하고 학살하였습니다 (그의 집권 기간 10-5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우간다의 경제를 좌우하던 인도인들을 강제로 추방하였고, 운영 능력이 부족하여 우간다의 경제는 파탄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디 아민에 대항하는 우간다 민족 해방 전선 (Uganda National Liberation Front, UNLF)이 밀턴 오보테, 요웨리 무세베니 (Yoweri Museveni) 등을 중심으로 탄자니아에서 결성됩니다. 이디 아민은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탄자니아를 침공하지만, 탄자니아군과 UNLF에게 처참히 깨져 결국 축출됩니다.

 

이디 아민이 축출된 뒤에는 UNLF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밀턴 오보테가 다시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요웨리 무세베니가 민족 저항군 (National Resistance Movement, NRM)을 결성하여 우간다 부시 전쟁 (Ugandan Bush War)이 발발합니다. 요웨리 무세베니는 1986년 우간다 부시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경제 성장을 이끌고 우간다 내에서 에이즈 발병률을 크게 낮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집권하고 있듯 독재를 하고 있으며 반대파인 아촐리족 (Acholi)을 학살했습니다. 이에 대항해 1987년 신의 저항군 (Lord's Resistance Army, LRA)이라는 광신적인 기독교계 테러 집단이 결성되어 현재까지도 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의 저항군은 소년병 징집, 성노예, 신체 훼손 등 반인권 범죄를 저질러왔습니다. 

 


8) 르완다: 르완다, 르완다 공화국 / Rwanda, Repubulika y'u Rwanda (르완다어); Rwanda, Republic of Rwanda (영어) / 르완다, 르완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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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완다'는 과거 이 지역에 있던 '르완다 왕국 (Ubwami bw'u Rwanda)'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이 지역에는 피그미족 (Pygmies)의 일파인 트와족 (Twa)이 거주하며 사냥과 채집을 하였습니다. 이후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이 이주하였고, 이 중 후투족 (Hutu)은 주로 농경을, 투치족 (Tutsi)은 주로 목축을 했습니다. 투치족의 한 부족을 다스리던 기항가 왕은 15세기에 주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르완다 왕국을 세웁니다. 르완다 왕국은 후투족이 훨씬 많았지만 투치족이 지배층을 차지하였습니다. 다만 이들은 혈통, 언어, 문화, 풍습을 공유했기에 어느 정도 섞여 살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독일인이 도래하였고, 1885년 독일 제국은 오늘날의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탕가니카 지역)를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로 삼습니다. 다만 독일 제국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이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탄자니아 (탕가니카 지역)는 영국의 위임 통치령 (mandate)으로 지정합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루안다-우룬디 (Ruanda-Urundi)로 묶여 벨기에의 통치를 받습니다. 벨기에는 혈통상 비슷했던 후투족과 투치족을 키, 콧대 길이, 재산이라는 어이없는 기준으로 분류하여 신분증에 민족을 표시하도록 하여 분열 통치를 하였습니다. 혈통보다는 목축 생활로 인해 고기와 우유를 많이 섭취했던 투치족이 키가 커서 우대받았고, 반대로 농경 생활을 했던 투치족이 차별받았습니다. 루안다-우룬디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엔 신탁통치령 (trusteeship)이 되고, 1959년에 유엔 신탁통치령 하의 르완다 왕국과 부룬디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르완다 왕국은 1959년 후투족을 중심으로 일어난 르완다 혁명으로 1961년 무너지고, 르완다는 1962년 르완다 공화국으로서 벨기에로부터 독립합니다.

 

르완다 공화국의 첫 대통령은 후투족인 그레구아르 카이반다 (Grégoire Kayibanda)였고, 그는 후투족을 우대하고 투치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쳤고, 많은 투치족들이 우간다를 비롯한 외국으로 도망갑니다. 이후 후투족인 쥐베날 하뱌리마나 (Juvénal Habyarimana)가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그레구아르 카이반다를 축출하였습니다.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후투족과 투치족을 융화시키고자 하기도 하고, 커피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어느 정도 이루기도 했으나, 여전히 투치족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며 투치족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도 하는 등 교묘하게 투치족을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커피값 폭락으로 르완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폴 카가메 (Paul Kagame)를 중심으로 한 르완다 애국 전선 (Front patriotique rwandais, FPR)이 우간다에서 조직되어 르완다 정부군과 내전을 벌입니다. 르완다 내전은 1993년 아루샤 조약 (Arusha Accords (Rwanda))으로 종전되는 듯 했으나,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Cyprien Ntaryamira) 부룬디 대통령과 평화 협상을 논의하러 가던 길에 비행기가 격추되어 암살되자, 후투족 강경파가 투치족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하여 르완다 학살이 일어납니다. 르완다 학살로 인해 투치족의 70%가 학살되었고, 투치족 학살에 동조하지 않은 후투족도 배신자로 간주되어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르완다 학살 이후 후투족 강경파들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이 틈을 타서 투치족 중심의 FPR은 르완다를 장악합니다. 이에 후투족들이 보복을 두려워하며 자이르 (현. 콩고민주공화국)로 피란갔지만, FPR은 전투 중지를 선언하고 보복을 금지하고 온건파 후투족과 연립 정부를 세웁니다. 폴 카가메는 이후 대통령이 되었고, 민족 차별을 금지하였고 교육과 경제 개발에 힘써 르완다를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벨기에의 식민 지배 청산을 위해 프랑스어 배제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치안 강화와 부패 척결에도 힘썼습니다. 다만 폴 카가메는 콩고 전쟁에 개입한 바 있고, 철권 통치로 반대파를 억압하며 장기 집권을 도모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박정희

 


9) 부룬디: 부룬디, 부룬디 공화국 / Uburundi, Repuburika y'Uburundi (룬디어); Burundi, République du Burundi (프랑스어); Burundi, Republic of Burundi (영어) / 부룬디, 부룬디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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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룬디'는 과거 이 지역에 있던 '부룬디 왕국 (Royaume du Burundi)'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룬디어로 'Rundi'라는 말 앞에 'Bu'가 붙으면 '룬디국 (Burundi)', 'Ki'가 붙으면 '룬디어 (Kirundi)'가 된다고 합니다. 'Rundi'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 지역에는 피그미족 (Pygmies)의 일파인 트와족 (Twa)이 거주하며 사냥과 채집을 하였습니다. 이후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이 이주하였고, 이 중 후투족 (Hutu)은 주로 농경을, 투치족 (Tutsi)은 주로 목축을 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혈통, 언어, 문화, 풍습을 공유했기에 어느 정도 섞여 살기도 했습니다. 이후 르완다 지역에서 이주한 은타레 1세 (Ntare I)는 17세기 말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부룬디 왕국을 세웁니다. 

 

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독일인이 도래하였고, 1885년 독일 제국은 오늘날의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탕가니카 지역)를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로 삼습니다. 다만 독일 제국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이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탄자니아 (탕가니카 지역)는 영국의 위임 통치령 (mandate)으로 지정합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루안다-우룬디 (Ruanda-Urundi)로 묶여 벨기에의 통치를 받습니다. 벨기에는 혈통상 비슷했던 후투족과 투치족을 키, 콧대 길이, 재산이라는 어이없는 기준으로 분류하여 신분증에 민족을 표시하도록 하여 분열 통치를 하였습니다. 혈통보다는 목축 생활로 인해 고기와 우유를 많이 섭취했던 투치족이 키가 커서 우대받았고, 반대로 농경 생활을 했던 투치족이 차별받았습니다. 루안다-우룬디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엔 신탁통치령 (trusteeship)이 되고, 1959년에 유엔 신탁통치령 하의 르완다 왕국과 부룬디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부룬디는 1962년 부룬디 왕국으로서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지만, 얼마 안가 투치족인 미셸 미콤베로 (Michel Micombero)의 쿠데타로 1966년에 일당제 공화국으로 전환됩니다.

 

미셸 미콤베로는 1967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알코올 중독과 편집증이 생겨 그를 퇴진하려는 시도들이 이뤄집니다. 특히 1972년 탄자니아 정부의 후원으로 후투족 반란이 급속도로 퍼지는데, 이에 후투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저지릅니다. 미셸 미콤베로는 1976년 투치족인 장 바티스트 바가자 (Jean-Baptiste Bagaza)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장 바티스트 바가자는 대통령이 된 뒤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는 후투족에게 어느 정도 이권을 양보했고, 경제 개발을 추진하지만, 야당을 금지하고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는 등의 독재 정치를 펼쳤습니다. 장 바티스타 바가자는 1987년 피에르 부요야 (Pierre Buyoya)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피에르 부요야가 새로운 대통령이 됩니다. 피에르 부요야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새 헌법을 제정하고 학살 사건 조사에도 합의했습니다. 이후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후투족인 멜키오르 은다다예 (Melchior Ndadaye)가 대통령이 되지만 당선 3개월 만에 쿠데타가 일어나 암살당합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고, 1994년 후투족인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Cyprien Ntaryamira)가 새롭게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시프리앵 은탸미라 대통령이 쥐베날 하뱌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평화 협상을 논의하러 가던 길에 비행기가 격추되어 암살되자, 후투족 극단주의자와 투치족 군부가 들고 일어나 부룬디 내전이 발발합니다. 이 틈을 타 피에르 부요야가 1996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고, 2000년에 아루샤 조약 (Arusha Accords (Burundi))으로 후투족과 투치족의 차별을 없애고 과도 정부가 구성됩니다. 

 

이후 2005년에는 내전이 종식되고, 같은 해 선거에서 후투족 반군 출신 피에르 은크룬지자 (Pierre Nkurunziza)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피에르 은크룬지자 대통령은 내전 이후 부룬디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반대하는 시위대를 탄압하며, 쿠데타도 진압하며 장기 집권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2020년 대선에 불출마하고 에바리스트 은다이시미예 (Évariste Ndayishimiye)를 지원하여 당선시킵니다. 그러나 피에르 은쿠룬지자는 임기를 끝내기도 전에 코로나19 감염에 의한 것으로 의심되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합니다. 

 

 

10) 탄자니아: 탄자니아,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 / Tanzania, Jamhuri ya Muungano wa Tanzania (스와힐리어) / 탄자니아,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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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는 과거 이 지역에 있던 '탕가니카 (Tanganyika)'와 '잔지바르 (Zanzibar)'의 이름의 앞부분을 잘라서 붙이고 (Tan+Zan) 접미사 -ia를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탕가니카'는 스와힐리어 (Swahili)로 '항해'를 뜻하는 'tanga'와 '황야'를 뜻하는 'nyika'가 합쳐져서 '황야에서의 항해'라는 뜻입니다. '잔지바르'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를 뜻하는 زنگ (Zang)과 '해안'을 뜻하는 بار (bâr)가 합쳐진 말인 زنگبار (zangbâr, '검은 해안')가 아랍어로 들어와서 زنجبار (zanjibār)로 변형된 것입니다.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 (The Olduvai Gorge)에서 여러 종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ustralopithecus spp.)와,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능력 있는 사람', 최초의 사람속 (Homo))의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탄자니아는 인류의 발상지 중 한 곳입니다. 현생 인류로서는 코이산족 (Khoisan)이 거주했으나,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의 남하로 밀려납니다. 또한 나일로트계 민족들 (Nilotic people)도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로 남하합니다. 탄자니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남부의 인도양 연안은 고대부터 인도양 무역로로 활용되어 인도 및 아랍 지역과 금, 상아, 노예 무역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투어 (Bantu) 바탕에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인 스와힐리어 (Swahili)가 교역 언어로서 발전합니다. 

 

이후 15세기에 이르러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를 비롯한 포르투갈인들이 탄자니아에 도달하였고, 이들은 1505년 잔지바르 섬을 비롯한 해안 지대에 거점을 만들고 요새를 건설하였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초에 이르러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سلطنة مسقط وعمان (Salṭanat Masqaṭ wa-‘Umān))이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고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은 1840년 잔지바르로 천도하였고, 탄자니아 내륙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수출하면서 번영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독일인이 도래하였고, 1885년 독일 제국은 오늘날의 탄자니아 (탕기니카 지역), 르완다, 부룬디를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로 삼습니다. 다만 독일 제국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이 탄자니아 (탕가니카 지역)는 영국의,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위임 통치령 (mandate)으로 지정합니다. 이 시기 잔지바르는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에서 독립하여 잔지바르 술탄국 (Usultani wa Zanzibar)을 형성하였으나, 노예 무역을 놓고 영국과 갈등하여 영국-잔지바르 전쟁을 치르고 (선전포고-전투-항복까지 "38분"이 걸렸습니다.) 영국의 보호령이 됩니다.  

 

탕가니카 지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입헌 군주국이었다가, 1962년 탕가니카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한편 잔지바르 지역은 1963년 영국으로부터 잔지바르 술탄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지만, 1964년 잔지바르의 흑인들이 봉기하여 잔지바르 인민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곧이어 탕가니카 공화국과 잔지바르 공화국은 합쳐서 탕가니카-잔지바르 연합 공화국이 되었다가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이 됩니다.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줄리어스 니에레레 (Julius Nyerere)였는데, 그는 무상 의무 교육 제도를 도입하여 문맹률을 줄이고 민족, 지역 통합을 추구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고, 이 덕분에 탄자니아에서는 내전과 쿠데타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민족 통합 과정에서 스와힐리어 사용을 강제하고, 집단 농장 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1985년까지 오랜 기간 독재를 했습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1985년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물러났습니다. 이후 탄자니아에는 민주 선거가 시행되어 재선까지 가능한 5년 임기의 대통령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1) 말라위: 말라위, 말라위 공화국 / Malaŵi, Dziko la Malaŵi (체와어); Malawi, Republic of Malawi (영어) / 말라위, 말라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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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위'는 과거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에 걸쳐 있던 국가인 마라비 왕국 (Malaŵí)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말라위'는 체와어 (Chichewa)로 '불꽃'을 뜻합니다. 이 지역에는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이 10세기 무렵 이주해왔고, 16세기에 이르러 마라비 왕국 (Malaŵí)을 세웁니다. 마라비 왕국은 오늘날의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에 걸친 영역에 있었고, 17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교역하였습니다. 마라비 왕국은 18세기 초 부족장들간의 내분과 노예 무역의 급증으로 쇠퇴합니다. 이 틈을 타 영국과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놓고 경쟁을 하다가 영국이 1889년 이 지역을 영국령 중앙아프리카 보호령 (British Central Africa Protectorate)으로 선포하면서 말라위는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이후 1907년에는 니아살랜드 (Nyasaland)로 이름이 바뀝니다. 또한 1953년에는 영국령 북로디지아와 남로디지아와 합쳐져서 영국령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을 형성하였다가, 1963년 해체됩니다.

 

말라위는 19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헤이스팅스 반다 (Hastings Banda)가 초대 대통령이 되어 말라위 의회당 (Malawi Congress Party, MCP)을 중심으로 일당 독재를 시행하였고, 1971년에는 종신 대통령이 됩니다. 다만 그는 빈농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농민들에게 비료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엄격한 전체주의 통치로 무력 충돌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헤이스팅스 반다는 정치적 자유를 높여야 한다는 압박에 1993년 국민 투표에 동의하였고, 말라위에는 1994년 다당제 선거가 실시됩니다. 이 선거에서 헤이스팅스 반다는 패배하였고, 바킬리 물루지 (Bakili Muluzi)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바킬리 물루지는 대기업 간부 출신이었는데, 헤이스팅스 반다의 비료 무상 공급 정책을 폐지하고 농업 필수품을 독점하여 이득을 취했습니다. 말라위의 경제는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데 비료를 무상 공급받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곤경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바킬리 물루지는 1999년 재선되었고, 2004년에 물러납니다. 이후 말라위는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 (부정 선거 논란 등)을 겪었고,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12) 모잠비크: 모잠비크, 모잠비크 공화국 / Moçambique, República de Moçambique (포르투갈어) / 모삼비크, 모삼비크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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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잠비크'는 이 지역에 있는 '모잠비크 섬 (Ilha de Moçambique)'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이 섬을 지배했던 아랍 상인인 '무사 빈 비크 (موسى بن بيك (Mussa Bin Bique))'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모잠비크 섬은 1898년 이전까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중심지였고, 이후 중심지를 남부의 로렌수 마르크스 (Lourenço Marques, 오늘날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투 (Maputo))로 옮깁니다.

 

이 지역에는 원래 코이산족 (Khoisan)이 거주하고 있다가,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이 이주하면서 농경이 시작됩니다. 이후 9세기부터 인도양 무역이 시작되면서 모잠비크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연안에 항구 도시들이 세워집니다. 아프리카 내륙의 금, 상아가 인도양을 타고 거래되었고, 무역로를 타고 이슬람이 전래되기도 하며, 아랍어의 영향으로 스와힐리어 (Swahili)가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 1498년 포르투갈인들이 도래하면서 아랍인들을 밀어내며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은 모잠비크 섬을 중심으로 이 지역을 인도와 동아시아로 건너가기 위한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포르투갈은 19세기 들어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 침탈을 본격화하자 내륙 지대 개발에 힘쓰며, 식민지 경영의 중심지를 모잠비크 섬에서 본토로 옮깁니다.

 

한편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 전역에 반식민주의와 공산주의가 퍼지면서 1964년 '모잠비크 해방 전선 (Frente de Libertação de Moçambique, FRELIMO)'이 결성되어 독립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의 독재 치하에 있던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진압에 나섰지만, FRELIMO는 공산권 국가들과 탄자니아, 잠비아, 이집트 등의 지원을 받으며 투쟁합니다. 오늘날 모잠비크 국기에 공산권 계열의 소총인 AK-47이 그려진 것도 이 영향입니다. 포르투갈은 FRELIMO를 와해 직전까지 몰아세우지만, 1974년 본토에서 카네이션 혁명 (Revolução dos Cravos)이 일어나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모잠비크는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합니다.

 

FRELIMO를 이끌었던 사모라 마셸 (Samora Machel)이 FRELIMO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일당제 국가인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República Popular de Moçambique)'를 세웁니다.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은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고, 당시까지만 해도 백인 중심 국가였던 로디지아 (오늘날의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던 흑인 정치 단체들의 반정부 운동을 지원합니다. 이에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FRELIMO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 성향 흑인들을 중심으로 한 '모잠비크 민족 저항 운동 (Resistência Nacional Moçambicana, RENAMO)'를 지원하여 모잠비크 내전 (Guerra Civil Moçambicana)이 1977년 발발합니다. 모잠비크 내전은 소련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각각 FRELIMO를 중심으로 한 정부군과 RENAMO를 중심으로 한 반군을 지원하며 오랜 기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1986년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온건파였던 조아킹 시사누 (Joaquim Chissano)가 집권합니다. 그는 1990년 일당제 및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및 시장 경제를 도입하며, 나라 이름을 '모잠비크 공화국'으로 변경합니다. 이어 소련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정부군과 반군을 더이상 지원하지 않게 되면서 1992년 평화협정이 체결되며 모잠비크 내전은 종결됩니다. 이후 모잠비크에는 자유 선거가 도입되었는데, 조아킹 시사누가 1994년, 1999년 두 차례 대선에서 당선되었고, 2005년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모잠비크는 민주화 이후에도 FRELIMO가 집권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어로는 '모삼비크'에 가깝기 때문에, '모삼비크' 내지는 '모삼비크 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13)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 Madagasikara, Repoblikan'i Madagasikara (말라가시어); Madagascar, République de Madagascar (프랑스어) /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마다가스카르.png

 

-->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섬나라입니다. '마다가스카르'는 뜬금 없게도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 마르코 폴로 (Marco Polo)가 현재의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Mogadishu)를 섬으로 착각하고 'Madageiscar'라는 이름을 잘못 붙인 것을 르네상스 시기 지리학자들이 이 섬의 이름으로 붙이게 된 것입니다.

 

이 섬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뜬금없게도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 섬에서 카누를 타고 온 말레이인들입니다. 이어서 남동부 아프리카에서 반투계 민족 (Bantu people)이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남인도의 타밀인 상인들과 아랍 상인들이 도래하면서 이 지역은 인도양 횡단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또한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인들이, 17-18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도래하면서 유럽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다가스카르에는 여러 부족 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은 메리나 왕국 (Fanjakan'Imerina)은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안드리아나암포이메리나 왕 (Andrianampoinimerina)와 그를 이은 라다마 1세 (Radama I)가 부족들을 통합하여 마다가스카르 섬의 패권을 잡게 됩니다. 이 시기 메리나 왕국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노예 무역 폐지, 말라가시어의 알파벳 표기, 근대적 학교 설립 등 근대화 정책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라다마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왕비였던 라나발로나 1세 (Ranavalona I)가 30여년간 통치하는 동안 근대화 정책을 폐지하고 기독교를 탄압하여 왕국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버립니다. 이후 메리나 왕조는 쇠퇴하였고 이 틈을 타 프랑스가 침공하여 1897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마다가스카르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Philibert Tsiranana)가 초대 대통령이 되어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실시합니다. 다만 정치 경제적으로 여전히 프랑스와 연계가 깊었고,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1972년 봉기를 일으켜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를 축출합니다. 이후 디디에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가 1975년 대통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다 냉전이 종결되면서 1991년 대규모 시위로 물러납니다. 디디에 라치라카는 축출된 뒤 1996년 다시 당선되어 권좌에 복귀하지만, 한국발 IMF 위기로 해외 자본들이 철수하여 폭망하고 맙니다. 결국 2001년에는 CEO 출신이자 수도 안타나나리보 시장이었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Marc Ravalomanana)가 대통령이 되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심했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켰으며, 지방 행정 조직을 중앙 집권 형태로 개편했습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안드리 라조엘리나 (Andry Rojoelina)인데 그는 원래 음악 DJ로서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왔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안타나나리보에서 유명세를 얻어왔습니다. 그는 34세에 정부 여당의 기반이었던 안타나나리보의 시장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이에 마르크 라발로마나나는 안타나나리보에 지원되는 예산을 끊어버리고, 국가 경작지 절반을 한국 기업 대우 로지스틱스에 팔아치우는 병크를 저지르고 맙니다. 결국 2009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안드리 라조엘리나에게 권력을 이양했습니다. 안드리 라조엘리나는 이후 2018년 정식으로 치뤄진 대선에서 당선되어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4) 세이셸: 세이셸, 세이셸 공화국 / Sesel, Repiblik Sesel (세이셸 크리올어); Seychelles, Repulic of Seychelles (영어); Seychelles, République des Seychelles (프랑스어) / 세이셸, 세이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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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셸'은 이 지역을 처음 지배했던 프랑스에서,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장 모로 드 세셸 (Jean Moreau de Séchelles)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지역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무인도였고,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가 발견하여 알려졌습니다.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가 1609년 이 지역에 처음 상륙하였으나, 프랑스가 1756년 이 지역에 상륙하여 이름을 붙이고 지배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 해군이 세이셸을 점령하였고, 영국이 1814년에 세이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합니다.

 

세이셸은 19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제임스 맨첨 (James Mancham)이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1977년 초대 총리였던 프랑스알베르 르네 (France-Albert René)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임스 맨첨을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며, 1979년 세이셸 인민 진보 전선 (Seychelles People's Progressive Front)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일당제 국가를 선언합니다. 프랑스알베르 르네 대통령은 1981년과 1986년 두 차례의 쿠데타의 시도를 막아내고, 1993년 소련 해체와 함께 일당제를 포기하고 다당제를 도입합니다. 다당제 도입 후에도 민주 선거를 통해 프랑스알베르 르네 대통령은 2004년까지 집권했습니다. 프랑스알베르 르네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관광 산업에서 나오는 수익을 이용해 다양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이 도입되었습니다. 세이셸 인민 진보 전선은 2009년 인민당 (People's Party), 2018년 연합 세이셸 (United Seychelles)로 당명을 바꾸며 2020년까지 집권했으나, 2020년에 야당이었던 세이셸 민주 연합 (Linyon Demokratik Seselwa; Seychellois Democratic Alliance)에 패배하며 40년만에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세이셸 크리올어로는 '세셀'에 가깝기 때문에 '세셀' 내지는 '세셀 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15) 모리셔스: 모리셔스, 모리셔스 공화국 / Moris, Republik Moris (모리셔스 크리올어); Maurice, République de Maurice (프랑스어); Mauritius, Republic of Mauritius (영어);  / 모리스, 모리스 공화국

모리셔스.png

 

--> '모리셔스'는 이 지역에 1598년 도착했던 네덜란드인들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세습 총독 (stadholder)인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 (Maurits van Oranje)의 이름을 따서 'Mauritius'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거치면서 'Maurice'라는 프랑스어 이름이, 영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Mauritius'라는 영어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무인도였고, 1507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처음 상륙하면서 알려지게 되나 포르투갈인들이 이 지역에 흥미를 가지지 않아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1598년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이 지역에 정착합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지역의 모리셔스 흑단 나무 (Diospyros tessellaria)를 베고, 흑인 노예들로 하여금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하지만 수익이 좋지 않았고, 결국 1710년 네덜란드인들은 철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이 철수한 뒤 1715년 프랑스가 지배하면서 노예 노동을 통한 사탕수수 재배 및 설탕 생산이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1810년 영국 해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영국 치하에 들어갑니다. 영국이 지배하기 시작한 뒤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인도에서 계약 노동자들이 건너와 사탕수수 농장, 공장,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게 됩니다. 인도인들은 오늘날 모리셔스 인구의 68%를 차지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외 아프리카계 27%, 중국계 3% 등).

 

모리셔스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8년 영국으로부터 영연방 왕국의 형태로 독립합니다. 이후 설탕 산업이 쇠퇴하고 수출 가공 무역 부분이 성장했고, 관광 산업도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모리셔스는 1992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고, 민주주의가 상당히 정착되어 아프리카 내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모리셔스 크리올어로는 '모리스'에 가깝기 때문에, '모리스' 내지는 '모리스 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16) 코모로: 코모로, 코모로 연방 / Komori, Umoja wa Komori (코모로어); Comores, Union des Comores (프랑스어); جزر القمر, (Juzur al-Qumur/Qamar), الاتحاد القمري (al-Ittiḥād al-Qumurī/Qamarī) (아랍어) / 코모로, 코모로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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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모로'는 아랍어로 '달 (moon)'을 뜻하는 '카마르 (قمر (qamar))'에서 유래하는데, 아랍어는 모음을 따로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다르게 읽었을 뿐입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오스트로네시아인 (Austronesian)이며, 이후 아프리카 동부 해안,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만,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이주민이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인도양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산호, 용연향, 상아, 거북 껍데기, 금, 노예가 거래되었고, 이슬람이 전래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15세기 들어 이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سلطنة مسقط وعمان (Salṭanat Masqaṭ wa-‘Umān)의 도움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축출됩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프랑스의 식민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코모로는 1912년 마다가스카르 및 마요트 (Mayotte, 현재도 프랑스령)와 함께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및 속령들 (Colonie de Madagascar et dépendances)의 일부가 됩니다. 

 

코모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7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코모로 제도에는 응가지자 섬 (Ngazidja), 음왈리 섬 (Mwali), 은주아니 섬 (Ndzuwani), 마요트가 있는데 이 중 마요트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도 프랑스령입니다. 코모로가 독립한 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거나 시도되었고 (총 20번 이상), 음왈리 섬과 은주아니 섬이 프랑스로 다시 편입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이 와중에 육군 참모총장 출신의 아잘리 아수마니 (Azali Assoumani)가 19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3개 섬이 별도 대통령을 가지되 연방 대통령을 돌아가면서 선출하기로 하였습니다. 새로운 헌법에 따른 첫 선거인 2006년 대선에서 은주아니 섬의 아메드 삼비 (Ahmed Sambi)가 연방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 2011년 대선에서 음왈리 섬의 이킬릴루 두아닌 (Ikililou Dhoinine)이 연방 대통령이 되었다가, 2016년 대선에서 응가지자 섬의 아잘리 아수마니가 다시 대통령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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