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중국인들의 '체면(面子)' 때문에 빚어진 일들을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가 있는데, 장이머우의 '귀주 이야기(1992)'이다. 못 보신 분들은 보셨으면 좋겠다.

 

+

 

중국의 어느 시골 벽지의 아낙네인 귀주!, 홀몸이 아닌 임신 중이다. 귀주의 남편은 그 마을 촌장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갈빗뼈에 금이 가고, 남자의 중요한 부위 중 거시기(고환)가 촌장의 발길질에 차여 그만 부어올랐다. 귀주는 남편을 리어커에 싣고 '향'까지 데려가 의원에게 보인다. 이것에 부아가 치민 귀주는 그것을 따지기 위해, 촌장집으로 쳐 들어가 진찰영수증을 드밀며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촌장에게 보기좋게 면박만 당한다. 

 

귀주는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단순히 치료비 200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무마하려는 이공안의 말이 생각할수록 얄밉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귀주는 가족에게 말한다. 현까지 나가서 공안 당국에 하소연을 해보기로. 허나 이공안과 촌장은 친구사이다. 이공안은 귀주에게 촌장의 체면도 봐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하지만 귀주는 이공안의 부탁에는 들은 척도 안 한다. 그저 돈은 필요없고 촌장의 '사과'의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게다. 그걸 들어 줄 리 만무한 촌장의 배째라는 식에 귀주는 더 오기가 치민다. 이에 질세라, 귀주는 현까지 기어이 나간다. 거금 30원을 주고, 사적으로 공문서를 써 주는 할아버지의 문서를 들고 공안 당국에 접수했지만, 결과는 50원 오른 250원의 치료비 뿐이다. 

 

귀주이야기는 귀주가 촌장의 사과를 계속 요구하지만, 매번 거절을 당하면서 벌어지는 실랑이는 그렇게 드라마틱하진 않다. 그저 촌장에게 일말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귀주의 집념이 눈물겹도록, 때론 담담하게 귀주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장 이머우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결국, 귀주의 오기는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심산. 그렇게 해서, 좀 더 큰 도시(북경)의 공안당국까지 가서 재판을 받아보지만, 결과는 역시 매마찬가지. 매번 시내를 나갈 때마다, 귀주는 올케와 함께 벽지에서 자전거로 경운기로 버스로 해서 나간다. 한 번 시내에 나가는 데 드는 경비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 고추를 내다 판 돈으로 매번 경비를 충당한다. 귀주의 끈질긴 노력 끝에 시당국의 국장까지 만난다. 귀주가 국장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 과정이 무척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귀주는 국장을 만나는 데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국장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는 데는 먹는 것보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산 것이 액자에 담긴 그림이다. 그 과정을 장 미머우는 산골 벽지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사는 아낙네의 소박하고 순진한 모습을 아주 리얼한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카메라에 담아낸다. 

 

특히 자전거 인력꾼에게 거금 45원을 차비로 뜯기고 나서 시당국까지 용케 찾아갔지만, 그것이 바가지인 줄 미처 몰랐던 귀주. 국장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보기좋게 인력꾼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귀주랑 올케가 허탈해 하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세세한 풍경(북경의 재래식 시장 정경)들과 중국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일상 생활을 대비시키는 장 이모우의 세심한 연출이 돋보인다. 

 

귀주의 갖은 노력 끝에 촌장을 기소한 재판도 결국에 귀주의 패소로 끝났지만, 귀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귀주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나중에 다시 재기소하기로 약속한 끝에 시당국에서 조사차 나온다. 시당국은 재조사한 자료를 다시 심의한 결과, 촌장을 구류 15일에 처한다. 

 

그 와중에 귀주가 아기를 출산하는 데, 때마침 마을 주민 모두가 '향'에 경극을 보러 간 사이에 귀주는 난산을 하는 급한 처지가 된다. 남편은 급하다 못해, 촌장에게 간곡히 도움을 청한다. 촌장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한마디 쏘아붙인다. 

"자신들이 어려울 때만, 촌장을 찾냐고..." 

촌장은 마지못해 자전거를 앞세우고 지름길로 가기 위해 산을 넘고 열심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한 밤중이고 눈이 소복히 쌓인 추운 겨울이었건만, 촌장은 마을 주민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귀주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자신에게 앙탈을 부린 것이 화가 치밀지만, 그는 그 마을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촌장이다. 

 

촌장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귀주는 아들을 순산한다. 남편은 촌장에게 고맙다는 인사 차 촌장의 집에 들려 인삿말을 전하며, 한 달 후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일 예정이라며, 그 때 촌장님도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넨다. 

 

한 달이 다 되어가고, 귀주의 가족들은 잔치를 벌인다.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아들을 순산한 것을 축하해주는 마당에, 촌장이 시당국에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그만 끌려가고 만다. 그 소식을 들은 귀주는 혼자 중얼거리며 말한다. '난 사과를 원한 것이지, 촌장을 잡아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며...', 차에 후송되는 촌장을 막아 볼 심산으로 귀주는 지름길로 있는 힘껏 달린다. 그러나, 귀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후송차에 실려 끌려가는 촌장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귀주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귀주 이야기는 끝난다. 

 

蛇足 : 귀주가 올케랑 시당국까지 찾아가 촌장을 기소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올케에게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말하고 볼 일 보고 나와보니, 올케는 없다. 그 사이 올케는 바가지 요금을 씌었던 자전거 인력꾼을 우연히 보고서 인력꾼을 뒤따라 나섰던 것이다. (카메라가 멀리서 롱숏으로 처리한) 귀주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올케를 찾는 모습과 공리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과연 '공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영화는 199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작품상)과 공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추국타관사(추국이 소송을 걸다)인데, 우리에겐 귀주이야기로 개봉되었다. 장 이모우의 영화의 트렌드는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처럼 색채미적 요소가 가미된 리얼리즘과,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귀주 이야기>처럼 다큐적 요소가 가미된 리얼리즘 영화로 나눌 수 있다. 몇 년 전 개봉된 <5일의 마중>은 옛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에 만든 것 같은데, 차라리 만들지나 말 것을.

댓글 2

댓글쓰기
  • 2022.09.06 04:49
    베스트

    와 글을 굉장히 잘 쓰시네요 영상이 눈 앞에 그려지듯 하여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일단 결말은 제쳐두고 잔치에 참여한 촌장에게 그래도 귀주는 사과를 요청하려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문득 듭니다. 
     

  • 이지튀르 작성자
    2022.09.06 05:02
    베스트
    @Pinkfloyd

    아마도, 귀주가 아들을 순산하는 데 촌장의 도움을 받았으니 사과를 요청하지 않았지 싶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