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1mdoGQVbiuk?si=5g96fP44lWhd3H0O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궁극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서유럽(특히 독일)에서의 연속혁명을 희망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를 향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러시아 동지들은 이 악마의 잔치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도로 발전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가, 러시아 동지들의 피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팔짱끼고 지켜보며 내버려둘 비열하고 형편없는 겁쟁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러시아는 스탈린에 의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치의 히틀러와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급기야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내걸며, 서구 자본주의를 따라잡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해, 군비증강과 중공업 육성 정책을 통한 국가 사회주의 노선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 종말은 우리가 목도했던 바와 같이 구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레닌은 국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논쟁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우리의 실정에서 사회주의를 반대하거나 민족자주 세력은 사회주의를 국가 소유와 동일시켰다.
그들은 경제의 주요 부문들이 국유화돼 있기만 하면 사회주의 사회라고 불렀다. 레닌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맑스 또한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고 비판했다.
오매불망, 앞서간 혁명가들이나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꿈꾸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데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전 세계로 번져 연속혁명으로 나아가, 노동자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면 어떤 세상이 도래했을까? 그때는 마야코프스키가 시에 읊었던 대로, 거리는 우리의 붓, 우리의 팔레트, 광장은 넓은 도화지처럼 우리 마음껏 그려나갈 수 있었을까?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이 발생하면 돈은 벽지로도 사용된다. 예전 짐바브웨의 무가베 대통령이 42년을 통치하면서, 그의 무지한 정책으로 기인한 탓에 그 나라의 국민들은 실제로 돈을 벽지로 사용했다. 극심한 실업률을 해소하고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윤전기로 돈을 무가지(무가치)로 무지막지하게 찍어낸 결과이다.
케인스의 어록 중에서..."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근대적 산업화를 금융 자본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간의 경제적인 얼크러짐을 최대화하려는 이들보다는 최소화하려는 이들에게 공감한다."
내가 아는 한, 파시즘이란 이런 것이다. '떼'가 '때'를 잘못 만나면 언제 어디서든 파시즘으로 변모한다. 떼는 무리들이고 때는 시대의 환경이 조성한 권력이다. 우린 스스로 모놀로그를 통해 자아를 부단히 연마(자신을 인식하고 감시)해야 한다.
독일 나치즘(히틀러)의 태동(역사적 산물)은 이러하다. 세계 1차대전에 의한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은 천문학적이었고, 그 이후 발생한 대공황(1929)을 배경으로 탄생한 괴물이었다.
독일의 나치즘을 경제(전쟁물자)적으로 원조했던 게 바로 포드 자동차(컨베이어 시스템)를 창시한 헨리 포드였다. 왜냐하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독일의 파시즘으로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가로막아야 했고 돌파구는 또 전쟁(세계 2차대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서유럽에서 노조가 가장 강력했던 게 바로 독일이었다. 만약에 독일이 러시아처럼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성공했다면 서유럽도 도미노처럼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을 탔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사민주의(수정주의)도 그런 배경(사회주의 혁명의 두려움)으로 탄생한 것이다. 즉 먹고사는 문제가 극에 다다르면 사회주의 혁명 아니면 파시즘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빌헬름 1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닦아 놓은 부국강병에 심취했던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권좌에서 내쫓고, 통일된 독일의 민족주의가 유럽의 패권국가로 부상하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서 발생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유럽에서 균형의 추를 잡고 싶었는데, 빌헬름 2세는 전 유럽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했다.
결국에 독일은 1차 대전의 패망과 함께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연합국 측에 지불하기에 이른다. 이 때 케인스는 파리강화회의(1919년)에 영국 재무성 수석대표로 참석했는데, 연합국의 다른 대표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며 사퇴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당시 케인스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이러했다. 승전국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독일(패전국)에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렸다. 이에 케인스는 우려를 표명했던 것이다. 결국에 케인스의 우려에 반하는 베르사이유 조약(1919년)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독일은 그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윤전기로 돌려 마구 찍어대니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전쟁의 폐해로 허덕이는 것도 모자라, 돈이 휴지조각인 가운데 독일 국민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은 1929년을 맞아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가자, 재즈 시대(황금기)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룬다. 독일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지나치게 비싼 물가에 허덕이고 세계 경제대공황(디플레이션)의 여파로 인한 실업으로 지친 국민들은 하이! 히틀러와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필연이었을 거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는 서유럽이고 미국은 직접적 피해도 없기에 전쟁특수에 힘입어 경제가 다시 활성화된다.
역설적으로 대공황의 여파에 대한 돌파구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결국에 인류는 끔찍한 대가를 치루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인명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600(?)만 생사람(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연기로 사라지게 한 건 최대 하일라이트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명실상부한 패권국가로 부상했다.
한 위대한 경제학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은 정치적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린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아야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번 반복되었다.
"세상의 정부나 국민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헤겔
댓글 3
댓글쓰기분배적 정의 참 어렵더라구요. 공리주의가 옳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재분배의 역설도 있고 공유지의 비극과 사유화의 비극도 나오고 자연선택 사화적 도채 불완전고용 반자율적 피용인 문제도 있고 수렵 채집 사회 이후 등장한 농경사회에서 출현한 지위 권한 직위 위계 계층 불평등 양극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았을까 안간릐 욕구를 가스르지 않고 분배 공정과 신념 소구를 만족 시키는 정책 사만주의가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됩니다.
인간의 소유와 관련된 ㅇ욕구도 중요한데 공공재와 사적쟈의 쟈분재 사화복지 사이에서 보편족지와 선별복지 문제 열망적 박탈감 악의적 선망도 있어서 과연 이런 재분배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법칙이 았을까 생각읊 해보게 됩나다.
케인즈 학파도 틀린 이론을 제기했다는게 최근 경제학의 주장이던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