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글
인기글
정치인기글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정치/시사
라이프
19이상만
EastSideStory
2023.05.28 21:39
53
1
https://itssa.co.kr/4144690

https://youtu.be/_ecL-HLRRII

 

 

우연과 필연, 그리고 디지털과 바이오(19년 전 블로그 게시물이지만)...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이다."

위 큰 따옴표의 문장은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의 속표지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J.모노는 무신론적 입장의 분자생물학자이다.

그래서였는지 다음 인용글로는 알베르 까뮈의 시론인 <시지포스의 신화> 속의 단상이 이어진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내 자신은 우연의 산물인가? 필연의 산물인가?

역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우연'의 산물일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

그럼 그 이후에 내가 만들어 가는 삶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여기서 막힌다. 하이데거의 기투성의 개념을 갖다 붙인다면?

우연성보다는 필연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것인지?

우연성에 반하는 자유의지는 생명이 붙어 있는 유기체에게선 필연적인가?

정말 우주 속에 존해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산물인가?

동양 역학(주역)에선 숙명이란 게 있다.

숙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인간에게서 숙명(결정)을 거스르게 되면 운명(자유의지)은 고통으로 점철된다.

물론 숙명은 예측보다는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운명(자유의지)은 개체의 삶을 확률(확률이라는 말은 정확한 수치를 말하는 것이 그렇게 될 개연성이 높다는 뜻일 것이다.)적으로 적용시킨 거라고 볼 수 있다. 동양 역학에선 인간의 숙명보다는 운명이 더 크게 작용하는 걸로 본다. 즉 자유의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인간에겐 운명도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선 필연적인 죽음이다.

그래서, 까뮈는 시지프스의 굴레는 숙명적이지만 그 숙명을 받아들이며 꿋꿋이 투쟁(자유의지)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빗대어,우연성에 내던져진 사람의 운명은 그 자체로 삶을 충일시키기에 충분함으로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저 '우주'는 유기체(화이트헤드가 생각하는 것처럼)인가? 아님 무생물인가?

노장사상에는 우주에도 숙명이 있다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다.

왜, 그런가는 노자와 장자는 자연의 그러함을 거스르지 말고 스스로 그러함의

道를 말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본받지 못하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양 자유의지를 자기들 멋대로 입맛에 따라

맛보길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장은 종국에 우주의 숙명(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거스르면

인간은 도(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는 잠언을 들려주는 것이다.

내가 생가하기에 엔트로피 시간(열 역학 제2 법칙), 비가역 시간(시간의 화살)은 그 정확한 시간의 열적 죽음(평형)이 언제일지는 예측하긴 어렵지만 고정된 미래 값(전체성)은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지금의 21세기 게놈 프로젝트가 거진 완성의 단계에 들어서 있다.

며칠 전에 인간의 난자 세포의 줄기 세포에서 추출한 유전자로 인간의 복제까지 물론이며 신경이 훼손된 것까지 되살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우리(인간)는 무엇인가? 정신과 행동까지 밝혀낼 게놈 프로젝트는 과히 바이오 혁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을 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디지털 혁명이다. 그 복잡한 수식(약 30억의 유전자 정보)의 계산을 원할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슈퍼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생명(바이오)을 관장하는 질병에 관한 예측까지 가능하다니!
거의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바이오 혁명으로 들어선 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바이오와 디지털의 과학과 기술은 자본과 더 밀첩하게 유착관계를 맺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유전자(DNA)의 기능연구와 함께 유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네트워크)의 구조를 밝혀내고 단백질(프로테이션)의 구조를 밝혀내는 그 순간, 생물(인간 포함)의 생명의 신비는 거진 다 밝혀질 것이다.

이것으로 볼진대, 디지털과 접목된 바이오의 과학은 대형화, 대량화, 초고속화로 진전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영 원

그것을 되찾았도다!

무엇을? -- 영원을.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


윗 시는 랭보의 '영원'이라는 시 중에서 첫 행이다.

왜, 랭보는 그것(영원)을 '태양(남성 명사)과 섞인 바다(여성 명사)'라고 읊었을까?

비밀의 열쇠는 아마도 랭보가 쥘르 미슐레의 책과 자연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인식이 표현된 것일게다.

"사랑하고 번식하는 것,그것이 바로 이 위대한 바다의 실제 작업이며 일이다.사랑은 밤을 풍요롭게 채운다.그러한 것이 바다이다. 바다는 지구의 위대한 암컷의 총체인 것이다.지칠 줄 모르는 욕망,영원한 수태,분만을 하는 암컷들의 총체,이것은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다."

- J.미슐레 -

'영원'이 태양과 섞인 바다라고 생각한 랭보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그 당시 자신이 직접 자연과학적인 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공상적인 개념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나 있다.

양자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무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어떻게 무에서 시간과 공간,그리고 물질이 생겼을까? 또 우주는 탄생한 후,지금까지 어떤 변화를 거쳐왔을까?

지구 탄생의 과학적 사실은 원시 대기 속에서 태양(빛)과 바다(물)가 만나서 빚어낸 것이 생명 탄생의 시초라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수소,메탄,암모니아 같은 환원성 기체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생명의 기원은 아미노산(단백질)의 합성과정에서 찾는다. 지금 한창 생명의 비밀을 캐기 위해서 유전자 정보를 해독하고 있다. 이 유전자 결합들이 다 아미노산(단백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실을 랭보는 직관적으로 터득할 것일게다. 영원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총체성을 말하는 것일게다.


과연 이런 과학의 발전은 우연의 결과인가? 필연의 결과인가?

인터넷(디지털)이 도구로서 불교 사상의 꽃인 화엄의 구현체로서 아주 그만인 매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인터넷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를 앞당기는 구현체로 작용할 것이라는 현실이다.

노무현이 인터넷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이미지를 급속하게 선전할 수 있는 도구를 발견한 것은 바로 인터넷(디지털)이었다.

인터넷은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의 불교 사상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바로 화엄 사상의 요체이다.

모든 정보가 공대되어 있는 인터넷은 물과 화엄의 메타포와 같다.

그 구현체로서의 인터넷은 화엄(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를 걸쳐 민주주의 열망과 여론을 자유롭게 형성할 수 있는,- 소수 선택된 오프 주도의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되는 여론 몰이가 아니라 - 결정에 이를 수 있도록 열려져 있는 시스템, 즉 만물, 민주적 열망으로 가득 찬 일반 시민들이 서로 서로 인연이 되고 있으며, 상호의존하여 연결된 상태)의 공동체였다.

물론 이것은 올바른 가치의 상황적 판단을 진보적 관점에서 취사적으로 선택하지 못했을 때는 유겐트화될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노빠나 황빠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인위적(기득권자들의 물리적인 저항)인 요소가 제거되었을 때, 물은 하나(전체)이자 모든 것이 된다. 화엄처럼 설키고 얼켜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인위적인 힘이 작용했을 때 물은 나뉘어진다.

그러나, 진보적 인간성(올바른 선택의 가치)의 구현의 장벽(물리적인 힘의 장애)이 없어진다면, 물은 하나가 된다.

이것이 올바르게 구현된다면, 인터넷은 곧 화엄이며 물(균질*평등*균등)의 총체성으로 가는 구현체가 되는 도구로 작용할 지도 모른다.

댓글 0

댓글쓰기
라이프
-
+